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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와와 함께하는 The wall

경기 광주 남한산성 범굴암

 

“술 한 병 사갈 걸 그랬다!”

2002년 석우·산사랑이 개척한 초·중급자용 암장

글 · 임성묵 기자  사진 · 주민욱 기자  협찬 · 살레와

 

 

경기도 불곡산(470m) 골수암장이 폐쇄된 줄 모르고 헛심만 쓴 취재팀은 속세를 내려다보는 마애불 앞에서 취재대상지를 급히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 범굴암으로 갑시다”라고 누군가 말했을 때 기자는 12년 전 어느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2002년 여름,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 한가운데서 비보를 접했다. 수년간 함께 줄을 묶었던 후배 신문희가 아이거 북벽에서 추락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순식간에 멍해졌다. 그와 함께했던 파키스탄 원정의 기억들이 잠처럼 쏟아졌고 꿈처럼 며칠을 앓았다. 일행을 설득해 두 달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문희를 산으로 인도한 장형원(48세, 석우산악회)씨의 손을 굳게 잡았다. 술상에 둘러앉은 조문객들은 문희가 아이거 정상부에서 바닥까지 1,800m를 추락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시신 상태를 말할 때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인 날 장례식장을 빠져나온 영구차는 남한산성 범굴암으로 향했다. 비가 와서 바위는 젖어있었다. 고인이 개척한 루트 앞에서 유골함을 열고 뼛가루를 한 움큼 쥐었다. 나는 그때 인간의 뼈가 이렇게 곱게 빻아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슬프게도 초크가루를 떠올렸다.

“다시 올께.” 넋 놓고 암장을 바라보던 지인들과 함께 발길을 돌리며 짧은 인사를 남겼다. 가슴을 찌른 그 날의 기억은 일상에 묻혀 시나브로 옅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주 한밤중처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랬는데 ‘범굴암’이라는 가시에 찔려 되살아난 문희에 대한 기억은 아이거 등반 나서기 두 달 전, 그러니까 암장 개척작업에 열중하던 20대 청년의 검게 탄 얼굴에 멈춰있었다.

 

 

석우산악회 주도로 개척된 암장

멀리 경기도 광주시와 성남시에 면해있는 남한산(522m)의 성곽이 이마에 차올랐다. 산성 안의 집들은 낮고 골목은 좁았다. 그래서 햇살을 오래 머금은 마당은 꽃과 나무가 풍성했다. 남한산성 도립공원은 그동안 개발이 제한되었기에 정취는 보존되었고 발전의 시각에서는 낙후되었다.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을 읽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혹한이 몰아닥친 1636년 겨울은 추웠다. 바람도 숨죽인 그 날 종일 칼바람이 울었다. 청나라에 맞선 자나, 투항한 자나 산성 안에 살던 모든 사람은 무참히 짓밟혔다.

수난의 역사가 깨어난 건 난(難)을 겪은 지 378년 후였다. 1999년부터 10년에 걸친 발굴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잊힌 역사가 상당 부분 드러났다. 지난 7월에는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축성술이 엿보여 동아시아 산성 건축술 교류의 증거라는 것이 유네스코가 밝힌 등재 이유였다.

산성에는 동서남북으로 총 4개의 문이 열려있다. 어느 곳으로 들어서건 지세가 험하지 않은 싱그러운 숲길과 만난다. 그 길을 따라 불당리 마을로 흘러들었다. 범굴암은 검단산(520m) 서쪽 자락에 위치한 암장으로 예부터 이곳 사람들은 굴에 범이 살았다 하여 범굴암 또는 굴바위로 불렀다. 오랫동안 외지인의 손을 타본 적이 없는 말하자면 미지의 바위였다. 2002년 아들과 함께 봄나들이 나섰다가 범굴암 앞에 선 산사랑산악회 조정환 회장은 “심봤다!”를 외쳤다. 하산 즉시 성남을 연고로 한 석우산악회(회장 우정영)에 공동 개척을 제안했다. 장형원씨는 그 길로 달려가 땅 주인의 허락을 받아냈다.

드높았던 망치 소리는 2002년 3월부터 5월까지 약 2개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특히 석우산악회 회원들은 전동드릴을 사용하지 않고 고전적인(?) 방법인 점핑으로만 볼트를 박아 말 그대로 수타(手打) 암장을 만들어냈다. 장씨는 거의 두 달간 매일 암장을 찾아 개척을 진두지휘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격으로 친동생 같던 신문희도 당당히 개척의 주역에 이름을 올렸다.

30m 높이에 50m 폭을 가진 아담한 암장에는 평일인데도 여러 동의 줄이 걸렸다. 어프로치가 10분 내외로 짧은 위력이라고나 할까. 암장은 중앙 크랙을 기준으로 좌벽과 우벽으로 나뉘었다. 재미있는 건 크랙 왼쪽은 산사랑산악회의 조정환 안종능 문성욱 김낙인 박희용씨가, 오른쪽은 석우산악회의 우정영 정동진 장형원 김영미 신문희씨 등이 서로의 길을 냈다는 점이다. 한 암장을 두 팀이 개척했으니 이해되는 대목이다. 좌벽에는 5.10급의 대중적인 루트가 많고, 우벽은 5.11급이 넘는 중급 루트가 즐비했다.

일행이 장비를 차는 사이 홀로 암장 우벽에 올랐다. 벽 중앙에 자리한 동판에는 ‘산이 좋아 산에서 잠든 문희야, 네가 꿈꾸던 산을 영혼이나마 마음껏 오르내려라’라는 벗들의 바람이 글귀로 남아있었다. 술 한 잔 따를 수 없는 빈손임을 깨달을 때쯤 “형! 등반해야죠”라는 이진아(경원전문대OB)씨의 호출에 가라앉은 대기는 순간 흔들렸다.

 

“보고 있나 이진아?”

머리가 자연스럽게 뒤로 젖혀지는 곡선이 오버행이라면 등반이 변모하는 모습을 오롯이 한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범굴암의 오버행은, 아리송하다. 크랙으로 기어들어갔다가 그 위로 솟구쳐 오른 바위를 넘어야 하고, 그게 끝인 줄 알고 방심하다가 짧은 급경사 슬랩을 만나 당황하고 만다. ‘하부님’(5.11a)의 상단 루프 돌파에 나선 진아가 애를 먹는다. 홀드를 잡았다 놓았다 하는 건 마음을 정리하는 대목이다. 지구력은 좋아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이쯤 되면 당연히 훈수가 나와야 한다. “힐훅을 걸어!” 확보를 보던 조경아(쿠드클라이밍센터 대표)씨가 먼저 거든다. 그래도 진아는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주의다. “저 친구 로컬 아니야?” 성남을 연고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니 반(半) 로컬로 봐도 무리는 없겠다. 그러나 어쩌나. 등반해본 지 하도 오래 돼서 동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마냥 새로운 홀드에서 배회하던 진아는 더 머물렀다간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았던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리를 쓱 올려 힐훅을 넣었다. 예상대로 손이 밀리는 걸 뒤꿈치가 막아주자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사뿐히 루프에 올라탔다. “진작 저렇게 하지.” 이구동성이었다.

암장 한편에선 관심을 두거나 말거나 등반에만 열중인 두 여성 클라이머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취재에 동참한 쿠드클라이밍센터의 류혜준 강정미씨로 특히 호리호리하기가 이를 데 없는 정미씨는 5.10급 루트인 ‘반석’의 크럭스에 서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잠시 들어보자.

“언니 잠시 만요!” “잠시는 무슨 잠시. 쉬지 말고 그냥 가!” 요지인즉슨 떨어져도 가다 떨어지라는 소리. 떨리는 손, 그리고 오버행을 돌파하기에는 조금 미치지 못하는 힘. 남은 앞길이 구만 리 같아 보였지만 정미씨는 기를 쓰며 밀어붙였고, 쌍볼트를 움켜잡는 작은 파란을 일으켰다. 누구의 등반과 대비되는 당찬 오름짓. 보고 있나? 이진아!

 

 

하이라이트인 우벽

암장을 품은 숲은 여름날의 비정상적인 푸른 빛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청춘의 시간을 사는 그 숲 사이로 한 줄 바람이 불어 땀을 흘린 일행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우벽은 칼로 잘라낸 듯한 오버행이다. 등반거리는 짧지만 힘과 기술이 없다면 홀드를 잡고도 전진하지 못하는 허망한 순간을 맞이해야만 하는 코스가 대부분이다. 그중 5.11급 ‘수어장대’의 손가락 한 마디가 겨우 걸리는 콩알만 한 홀드를 잡아본 이들이라면 “어우! 이거 뭐야”라는 반응을 보이는 게 다반사였다.

영문도 모르고 붙었다가 숱한 클라이머들이 좌절한 그곳으로 조경아씨가 나섰다. 수도승처럼 등반을 즐기는 그는 크럭스에서도 고요했다. 손끝에 체중을 전부 걸고도 초크를 칠하는 여유도 보였다. 어느 순간 몸을 오버행 위로 끌어올린 조경아씨는 진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균형을 잡으려면 동판 바로 위에 있는 스탠스를 밟아야 하나 그 경계가 모호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결정이 섰는지 발을 한껏 올려 부자연스러운 스탠스를 겨누었다. 동작은 무리가 따랐으나 동판은 피해 오를 수 있었다. 보다 새롭게 오르려는 시도인가. 암장개척자인 고인을 기리려는 전언인가.

“형! 배고파요. 밥은 주면서 일 시켜야죠”라는 진아의 말에 순식간에 악덕 취재업자가 되었다. 종일 빵 하나로 버티며 취재에 우선한 일행에게 내려가면 맛난 것을 약속하며 짐을 꾸렸다. “다시 올께!” 12년 전의 그 날처럼 발길을 돌리며 짧은 인사를 남겼다.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도 생각했지만,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오며 또 얼마나 흔들렸는지. 술 한 병 사갔어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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