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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의 67 _ 샌 게브리얼 산맥의 최고봉

 

독차지한

글 사진 · 신영철 편집주간

 

새해가 되면 미국 LA에 존재하는 산악회들은 마운틴 발디(Mt. Baldy)에서 첫 산행을 시작한다. 한인타운에서 드라이브 한 시간 정도면 입산이 가능한 산이기에 그렇다. 발디봉 정상은 수목한계선을 넘어서 3,068m의 고봉이다. 따라서 원래 이름인 샌 안토니오 산(Mt. San Antonio)보다 대머리(Baldy) 산이라는 별명이 더 유명한 것이다.

 

를 지내는 산

햇볕 뜨거운 사막성 기후인 LA를 에워싼 산맥에 겨울이 오면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진다. 어제까지 숨어 있던 고산준령이 홀연히 하얀 고깔을 쓰고 나타난다. 고도가 높으면 기온이 낮아지고, 그러므로 LA겨울은 발디봉 정상에 가장 먼저 온다. 발디봉은 특별하다. LA 어느 곳에서든 흰 눈을 덮어 쓰고 있는 발디 정상을 볼 수 있다. 샌 게브리얼 산맥의 많은 봉우리들 속에서 발디를 콕 집어 낼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산맥 속에 발디 정상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민둥 대머리라는 별명답게 정상부가 유독 하얗다.

그렇기 때문에 이산을 자주 오른 사람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샌 게브리얼 산맥의 최고봉이기도 한 발디봉은 새해를 맞으면 약속처럼 산악인들이 모여든다. LA에서 가장 오래된 재미한인산악회 역시 새해 첫 산행은 늘 발디봉이었다.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는 여러 곳이 있지만 오늘은 설벽을 타고 오르기로 했다. 정상부에서 사발처럼 둥글게 쏟아져 내린 남벽(South Face)을 직등하는 것이다. 눈이 많을 때만 가능한 이 코스를 발디 볼(Baldy Bowl) 직등루트라 부른다. 경사각이 40도를 넘나드는 난이도가 높은 코스였다. 이 발디 설벽은 히말라야 원정을 앞두고 설상훈련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산행시작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눈 쌓인 산장에 도착했다. 이 산장은 ‘스키헛’이라는 이름의 시에라클럽에서 운영하는 대피소. 앞마당에는 스키 등반을 하거나 타러 온 미국인들로 북적였다. 산장 옆 눈밭에서 재미한인산악회 회원들은 새해 세배를 나누었다. 세배 세레머니가 끝나고 회원들은 동계 장비를 착용했다. 가까이 다가 선 발디봉 설벽은 대단히 크고 가팔라 보인다.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들이 단골로 설사면 훈련을 하는 한라산 용진각 설면의 열 배쯤의 크기다. 원래 등산로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올라 새들 능선을 따라 오르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였다.

고도차 400여 미터를 직등하는 설벽 등반은 경험자들이 안내를 해야 가능한 루트였다. 초입은 완만하게 시작했다. 날씨는 포근했다. 스키헛 앞의 파인트리 뾰쪽한 바늘잎마다 크리스털 고드름을 달고 있다. 눈이 녹다 언 것이다. 어깨라도 스치면 크리스털 방울들은 맑은 쇳소리를 냈다. 눈은 두꺼운 이불이 되어 발디봉을 덮고 있다. 이불을 덮고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발디봉. 그런 상상이 가능한 증거도 보인다. 토끼인가 산짐승이 지난 발자국이 꼭 누비이불에 한 땀 한 땀 바느질 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발디는 눈 속에서 깊은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회원들의 거친 숨소리는 살아 있었다. 고도를 올리며 급격하게 경사각이 솟구치고 있다. 등산로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앞서 간 대원의 발자국이 새로운 등산로가 되는 것이다. 이 루트는 산사태 지역으로 눈이 없으면 등반이 불가능 곳이라 했다. 그러니 겨울에만 활용되는 설벽이었다.

 

가파른 설벽을 오르다

태양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처럼 더운 사막성 기후가 LA다. 그런데 인근에 이런 눈 깊은 산이 있었다니. 고소증 있을 높은 산과 설벽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점점 경사각이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하얀 설벽을 개미처럼 오르는 회원들 호흡이 거칠다. 가파른 설벽에서는 발디봉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정상처럼 보이는 전위봉들을 몇 개 넘어서야 되기 때문이다. 설벽에 찍히는 아이젠 소리가 경쾌하다. 낮은 고도가 아니라 더 그렇겠지만 피켈에 의지하여 가쁜 숨을 고르는 횟수가 많아졌다. 경사는 점점 더 가팔라지고 있다.

훈련 된 산악인이 아니라면 위험할 수도 있는 설벽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랑이 사이로 보이는 저 밑의 산장이 우리 위치와 고도감을 실감케 했다. 산행을 시작하며 설국엔 눈이 피워낸 상고대 꽃 잔치가 한참일 것이라는 예측은 맞았다. 다리가 뻐근한 강행군이었으나 조망은 훌륭했다. 샌 게브리얼의 하얀 고산준령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군청색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산맥이 더 웅장하게 돋보인다. 눈앞에 펼쳐지는 와이드 화면은 천지창조를 연출하는 엄청난 시청각 현장이었다. 다리는 힘들다고 아우성이었으나 자연과 합일이 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가파를수록 쉬는 횟수가 잦아졌다. 아이젠 발톱을 확실히 박아 넣고 피켈도 깊숙이 확보한 다음 눈밭에 앉아 숨을 고른다. 발아래로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넘나드는 구름은 산을 섬으로 만들고 있다. 사막의 도시 LA에 이토록 아름다운 설산이 있음이 거짓말 같다. 이렇게 경험하지 않는다면 믿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LA에도 산이 있느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하지만 LA 근교에는 아름다운 산이 많다. 그 중에서도 발디봉을 포함한 샌 게브리얼 산군은 LA를 ‘천사의 도시’로 만드는 배경이 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한발 더 나아가 북한산, 도봉산이 서울의 오아시스라면 발디봉을 포함한 샌 게브리얼 산군은 LA의 오아시스다. 그런 천국의 산이 있기에 엔젤레스, ‘천사의 도시 LA’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것이다.

 

민대머리

겨울 설벽을 오르며 새삼 발디봉의 숨은 그림을 찾는 느낌이다. 이런 풍경은 뭐지? 하며 처음 보는 그림처럼 눈 아래 펼쳐진 조망은 놀랍다. 정말 한국의 진경산수화가 시야를 압도하고 있다. 지금 발디봉는 운무를 불러 들여 굉장한 천지창조 흉내를 내고 있다. 이 산을 수십 번 올랐지만 처음 보는 풍경이다. 맞다. 언제나 처음이었다. 한 번 올랐다고 발디봉을 다 아는 것처럼 ‘나 거기 올랐어’ 하는 건 좀 유치하다. 산은 계절에 따라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비와, 눈과, 바람과, 기온과, 저녁과, 밤에 따라 산은 언제나 상황이 변하며 그 모습을 바꾼다. 그러므로 발디봉을 백번 올라도 언제나 처음일 수밖에 없는 법.

쉬는 횟수가 많아지며 생각도 많아졌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짧은 일생이 발디봉을 감싸고 도는 짧은 구름의 조화와 같다. 개미처럼 직선으로 등반을 시작한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드디어 경사각이 죽기 시작했다. 마지막 가파른 설릉을 올라서니 끝없는 설원이 펼쳐져 있다. 드디어 민대머리 발디 정상부에 도착한 것이다. 구름 사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는 하늘이 깊다. 수목한계선을 넘기에 거침없는 파노라마 풍경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정상까지는 아직 한참 더 가야한다. 정상에 도착한 사람들이 멀리 보인다.

우리도 드디어 해발 3,068m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돌을 쌓아 만든 캐른과 동판이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모여 정상에 오른 것을 자축하고 있었다. 우리도 새해 첫 등반을 무사히 끝낸 것에 감사의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인증 사진을 찍으며 360도 주변을 둘러봤다. 눈 아래 풍경은 황홀하다. 정상에서의 시선 또한 거침이 없다. 구름은 또 다른 마술가였다. 가깝게 서 있는 아이언피크와 멀리 무수한 산의 정상을 섬으로 만들어 놓았다.

 

360도

시선이 끝나는 곳에 머무는 다른 산맥도 눈에 쌓여 있다. 샌 골고니어(San Gorgonio·3,506m)와 샌 와신토(San Jacinto·3,293m) 산맥이다. 저 산맥의 최고봉은 우리가 서 있는 발디봉보다 약간 더 높다. 정수리에 눈을 쓴 두 산이 신기루처럼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눈에 덮여 은백색으로 빛나는 그 봉우리는 허리께쯤에서 잘렸다. 하얀 설선과 녹색으로 확실하게 경계선이 나뉘어져 있어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샌 게브리얼 산군. 그 산맥의 봉우리들이 모두 최고봉인 이 발디봉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듯하다. 이 산맥들도 허리께 쯤 뚜렷하게 설선이 구별되고 있다. 북쪽으로는 암갈색의 광활한 모하브 사막이 있었고, 동쪽으로 둥실 떠오른 태평양도 보인다. 멀리 태평양의 카나리아 섬까지 보인다. 섬까지 보이는 발디 정상에서의 조망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360도 파노라마였다. 툭툭 불거지며 눈 풍년을 맞은 샌 게브리얼 산줄기는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내려가야 할 때. 눈 표면이 얼어있어 아이젠에 밟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회원들 얼굴에 슬그머니 장난기가 돈다. 그도 그럴 것이 올라갈 때는 고통스러운 설벽이었으나 내려갈 때는 쉬울 테니까. 경사가 죽은 곳까지 내려서면 엉덩이 썰매, 글리세이딩을 할 수 있는 신나는 놀이터가 될 것이다. 올라갈 때 3시간 걸린 설벽을 불과 몇 십분 만에 내려가니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하산 길. 재미한인산악회와 인연이 고맙다. 미국 땅 남가주의 보석처럼 빛나는 축복 받은 산 발디봉의 새해맞이는 아주 특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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