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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트레킹 _ 뉴질랜드 케플러 트랙

  

피오르드랜드의 고원지대를 걷다


글 · 사진 이남기

 

 

‘뉴질랜드’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내 경우엔 우리나라에서 이민을 많이 가는 나라, 청정국가란 이미지, 거기에 마누카 꿀과 키위란 단어가 생각났다. 고사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뉴질랜드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볼 수 있다. 혹시 당신이 산을 좋아한다면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 경(Sir Edmund Hillary)이나 뉴질랜드 최고봉 마운트 쿡(Mount Cook), 뉴질랜드의 대표적 하이킹 코스인 밀포드 트랙(Milford Track)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태평양 남서쪽에 위치한 뉴질랜드는 남섬과 북섬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 높이 솟은 산맥과 빙하, 화산, 삼림이 있는가 하면 끝없이 펼쳐진 해안선에는 그림 같은 피오르드가 자리 잡고 있어 자연 경관이 무척 아름다운 나라로 꼽힌다.


 

남섬의 밀포드와 루트번, 그리고 케플러 트랙

태평양판과 오스트레일리아판의 충돌로 생겨난 뉴질랜드 산악 지형은 섬나라란 특성에도 불구하고 꽤나 넓게 분포되어 있다. 특히 남섬 같은 경우는 전체 면적의 2/3가 산지로 형성되어 있으니 우리 한반도와 비슷하다 하겠다. 그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하이킹이나 트레킹을 즐길만한 곳이 무척 많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뉴질랜드 정부에선 이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해 뉴질랜드 전역에 아홉 개의 그레이트 워크(Great Walk)란 트레킹 코스를 지정해 놓았다. 북섬에 세 개, 남섬에 여섯 개 트랙이 있다. 뉴질랜드의 청정한 자연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배낭을 메고 직접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어 얼마 전에 남섬 테아나우(Te Anau) 인근에 있는 세 개의 트랙, 즉 밀포드와 루트번, 그리고 케플러를 걷고 돌아왔다.

위에 언급한 세 트랙을 순위로 구분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미도 없다. 개인의 취향이나 스타일에 따라 선호도나 평가가 엇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08년 런던 스펙테이터(London Spectator)란 잡지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 소개된 밀포드 트랙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표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세계 여행이 쉽지 않던 시기에 쓰여진 우물 안 개구리 식 문구라 생각되어 난 그 표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성수기엔 하루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3박 4일로 세팅된 일정에 맞춰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여야 한다. 그에 비해 장쾌한 산악 풍경을 자랑하는 루트번 트랙(Routeburn Track)은 일정이 자유로운 편이고 캠핑이나 양방향 통행 또한 가능하다.

케플러 트랙(Kepler Track)은 밀포드 트랙이나 루트번 트랙에 비해 유명세는 좀 떨어진다. 하지만 그 두 개 트랙의 장점을 적절히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 나로선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만원인 산장의 번잡함도 피할 수 있어 나름 좋았다. 케플러 트랙은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Fiordland National Park)의 정수를 보여주는 60km 길이의 고산 트레킹 코스를 일컫는다. 테아나우에 있는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 방문자 센터에서 시작해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루프 트레일로 되어 있다. 케플러 트랙 안에 세 개의 산장이 있어 보통 3박 4일에 진행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걸어보니 2박 3일로도 충분해 보였다. 한 방향으로만 걷는 밀포드와는 달리 양방향으로 운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캠핑도 허용하고 있다. 산장을 잡는데도 훨씬 여유로웠고 일정 또한 자유로웠다.

 

뉴질랜드의 자연 보호 노력

뉴질랜드를 몇 차례 여행하면서 난 뉴질랜드 정부가 벌이는 자연 보호 캠페인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는 세관검사나 검역절차 역시 이런 맥락이라 그 속사정을 알고 나면 그들의 엄한 규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씨앗이 있는 과일이나 채소, 육류, 식품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지만 등산화나 텐트까지 검역을 하는 것은 좀 특이했다. 그것을 통해 병균을 지닌 흙이 유입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등산화에 대한 검역은 바닥을 살펴보는 정도지만 텐트를 가지고 입국하는 경우는 정밀검사를 피하기 어렵다. 실제로 입국심사에 텐트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렇다 답을 했더니 바로 텐트를 꺼내 정밀검사실로 가져가 병균이 있는 지를 샅샅이 조사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문에 30여 분 이상을 지체하긴 했지만 섬나라라는 뉴질랜드 특수성을 알기에 그리 섭섭하진 않았다. 검역 대상 물품을 신고하지 않는 경우는 즉석에서 벌금으로 400 뉴질랜드 달러를 물게 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럼 뉴질랜드는 왜 그토록 까다로운 규정을 여행객들에게 강요하고 있을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뉴질랜드는 섬나라다. 뉴질랜드가 형성된 8천 5백만년 전인 백악기부터 다른 대륙과 격리되어 지냈다. 오랫동안 박쥐 두 종류가 유일한 포유류였고, 250종에 이르는 조류가 평온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천적이 없는 세상이라 하늘을 날 필요가 없다 보니 새들은 날개가 퇴화하게 되었다. 이들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친 것은 외부에서 유입된 정착민들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오리와 백인 정착민 모두가 거기엔 책임이 있다. 그들이 이 땅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동물들을 반입해 들여왔고, 다른 대륙에서 창궐하던 전염병을 가져온 것이다. 뉴질랜드 자연이 균형을 잃고 예상치 못 한 시련에 놓이게 된 것은 한 마디로 인간이란 존재 때문인 것이다. 그만큼 외국에서 여행객들이 들여오는 동물이나 병균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판단에 의해 저질러진 자연 파괴의 사례는 많다. 뉴질랜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뉴질랜드 정부가 최근에 벌이고 있는 시책 가운데 하나가 스토우트(Stoat)의 박멸이다. 스토우트는 담비의 일종이다. 뉴질랜드 상징으로 여겨지는 키위(Kiwi)는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하늘을 날지 않아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었던 키위가 스토우트란 녀석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땅에 둥지를 만들어 알을 낳기 때문에 스토우트의 공격에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스토우트의 공격을 받아 멸종 또는 멸종 위기에 몰린 조류가 키위만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새였다던 모아(Moa)는 이미 멸종되고 말았고, 빨간 부리를 자랑하는 타카헤(Takahe)도 개체수가 엄청나게 줄었다.

19세기 말에 스토우트를 뉴질랜드에 처음 들여온 장본인은 바로 백인 정착민이었다. 농작물을 먹어 치우는 토끼를 잡으라고 들여온 스토우트가 열심히 도망치는 토끼보다는 훨씬 쉬운 먹이인 키위 알에 눈을 돌리면서 이런 재앙이 시작된 것이다. 밀포드나 루트번뿐만 아니라 케플러 트랙에서도 많은 덫을 볼 수 있는 것은 스토우트를 잡기 위한 뉴질랜드 정부의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다. 산장에서 매일 저녁 레인저와 대화를 나누는 헛톡(Hut Talk) 시간에 케플러 트랙에만 500개의 덫이 설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노력의 대가로 키위 개체수가 늘었냐고 물었더니 최근 들어 키위의 숫자가 상당히 증가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밤이 되면 산장에서도 키위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귀 기울여 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헛톡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자. 뉴질랜드에 있는 모든 산장을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남섬에 있는 세 개의 그레이트 워크에서는 산장 이용객을 대상으로 매일 레인저와의 대화시간을 갖는다. 산장 이용에 대한 수칙을 알려주는 것은 기본이고 산장의 역사나 주변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설명하는 시간도 갖는다. 이 시간이 따분하고 졸음이 온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이 시간이 자연 보호에 얼마나 필요한 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스토우트가 키위를 비롯한 조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를 설명하고, 새소리를 식별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어떤 레인저는 덫으로 잡은 스토우트 사체를 보여주며 현장에서 실감나는 교육을 하기도 했다. 이런 시간을 통해 뉴질랜드가 자연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홍보하고, 탐방객에게 자연 보호의 필요성을 교육하는 것이 나에겐 너무나 인상 깊은 일이었다.

 

장쾌한 산악 풍경은 자랑하는 케플러 트랙으로

이제 다시 케플러 트랙으로 돌아가보자. 케플러 트랙은 퀸스타운(Queenstown)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테아나우(Te Anau)에서 시작한다. 테아나우에 있는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 방문자 센터를 출발해 트레킹 기점까지 걸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셔틀버스를 이용하거나 차를 가지고 케플러 트랙 주차장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케플러 트랙 기점에서 시작해 한 바퀴를 전부 도는 것이 아니라 9.5km를 단축해 레인보우 리치 주차장(Rainbow Reach Car Park)에서 트레킹을 끝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경우엔 국립공원에서 추천하는 3박 4일에서 하루를 줄여도 전체 일정을 여유롭게 마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60km 전 구간을 걷고 덤으로 국립공원 방문자 센터에서 케플러 트랙 주차장까지 왕복 10km를 걸었다. 그러는 것이 돈도 절약되고 나로선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의 케플러 트랙을 상징하는 키워드라 하면 럭스모어 산을 오르는 능선에서 바라보는 장쾌한 산악 풍경과 두 개의 커다란 호수, 그리고 고원지대를 뒤덮은 터석(Tussock)과 비치(Beech)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이틀은 테아나우 호수를 내려다 보는 조망과 고원에서 자라는 터석을 많이 보았다면, 후반부 이틀은 마나포우리 호수(Lake Manapouri)를 보며 비치가 무성한 숲길을 걸어야 했다. 우리 말로 풀숲이라 부르는 터석은 뉴질랜드에서만 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뉴질랜드 남섬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식생이다. 특히 케플러 트랙에선 산악 풍경을 결정짓는 의미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각종 조류들이 그 안에 서식하며 새끼를 부화하는 공간으로도 쓰인다.

 

첫날

케플러 트랙으로 드는 첫날이 밝았다.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 방문자 센터에서 퍼밋을 수령하곤 테아나우 호숫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컨트롤 게이트까지 50분이 걸렸다. 케플러 트랙에 포함되지 않는 5km 가까운 거리를 추가로 걸은 것이다. 여기까지 차로 오는 사람이 많았다. 공식적인 케플러 트랙은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정표에는 럭스모어 산장까지 6시간이 걸린다 적혀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 이어진 비치 숲길을 호젓하게 걸었다. 키가 큰 고목 사이로 이끼와 라이킨, 그리고 고사리가 많이 보였다. 키가 작은 관목도 많아 숲 속에 푸르름이 가득했다. 우리 고사리와는 달리 키가 엄청 큰 트리 펀(Tree Fern)도 눈에 띄었다. 나뭇가지에 커튼처럼 매달린 라이킨은 청정지역을 나타내는 지표라는데 여기엔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한 시간 반 가량을 걸어 도착한 브로드 베이(Brod Bay)는 호수를 바라보며 땀을 식히기에 좋은 곳이었다. 워터택시를 타고 테아나우에서 바로 이곳으로 와서 트레킹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단다. 모래사장에 앉아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다시 두 시간 넘게 숲길을 걸어 절벽 아래에 있는 쉼터에 도착해 배낭을 내리고 휴식을 취했다. 쉼터를 조금 지나 숲을 벗어나니 능선이 나타났다. 수목한계선을 지난 것이다. 나무 대신 터석이 초원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초원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야가 탁 트이며 사방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발 아래로 테아나우 호수가 보였고, 한 귀퉁이에 테아나우 마을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맘껏 풍경을 가슴에 담았다. 한 아가씨는 바위에 앉아 망부석이 되어 버렸다. 부산에서 왔다는 남녀 산꾼 다섯 명을 능선에서 만났다. 이 세상에 있는 유명한 트레일을 찾아다니는 풍류객들로 보였다.

구비구비 능선을 따라 에둘러 가는 산길을 따라 럭스모어 산장(Luxmore Hut)에 도착했다. 주변 풍경에 한눈을 팔다가 의외로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컨트롤 게이트에서 여기까진 13.8km로 대부분 오르막이었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산장엔 사람들이 많아 좀 어수선했다. 나무 데크에 여기저기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헬리콥터 한 대가 시끄럽게 헬리포트에 내려앉았다. 산장으로 들어가 침상부터 정하고 짐을 풀었다. 슬리퍼 차림으로 럭스모어 동굴에 다녀왔다. 헤드랜턴을 가져가지 않아 안으로 깊이 들어가진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침상에서 낮잠을 청했다. 간단히 저녁을 준비해 먹고 있는데, 부산에서 오신 분들이 라면을 권해 좀 얻어먹었다. 저녁 무렵에 케아(Kea)란 뉴질랜드 고산 앵무새를 만났다. 먹이를 구하러 산장으로 내려온 모양이다. 몸집이 크고 지능이 높은 녀석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둘째 날, 하이라이트 구간을 걷는다.

둘째 날은 케플러 트랙에서 산악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하이라이트 구간을 걷는다. 산길이 해발 1,400m의 고지를 에둘러가기 때문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거의 없다. 하필이면 이런 날에 강풍이 불고 비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가 들린다.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떠올라 내심 일기 예보가 틀리기를 바랐다. 오전 8시 조금 넘어 럭스모어 산장을 출발했다. 아이리스 번 산장(Iris Burn Hut)까진 6시간이 걸린다 적혀 있었다. 길이 넓고 뚜렷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한 시간 가량은 바람이 좀 거세게 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산 아래로 테아나우 호수가 눈에 들어왔고, 그 건너편으론 거대한 멀치슨 산맥(Murchison Mountains)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해발 1,472m의 럭스모어 산(Mount Luxmore)으로 오르는 갈림길에 닿을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이 시속 80km가 넘는 바람에 실려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능선을 걸을 때는 바람에 밀려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배낭 무게까지 합하면 100kg이 넘을텐데도 속수무책으로 밀린다. 가끔 돌풍이 몸을 때리면 순간 휘청거리기도 하고 땅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배낭 커버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말았다. 10분이면 올라간다는 럭스모어 정상도 포기해야 했다. 포레스트 번 새들(Forest Burn Saddle)의 구비구비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걷는 것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몸을 굽히고 자세를 낮춰 바람을 향해 나가는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야만 했다. 산에서 강풍을 처음 맞은 것도 아닌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잠시라도 바람과 비를 피하기 위해 포레스트 번 대피소(Forest Burn Shelter)를 기웃거렸지만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들어갈 수가 없었다. 행잉 밸리 대피소(Hanging Valley Shelter)도 미련 없이 지나쳤다. 이런 악천후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라 이 지역에만 대피소 두 개를 지어놓은 것 같았다. 행잉 밸리 대피소를 지나 하산을 서두르는데 계곡 위로 커다란 무지개가 떠 강풍에 시달리는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배낭에 집어넣었던 카메라를 꺼냈다. 내리막 길을 쉬지 않고 걸어 너도밤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비는 내렸지만 바람과는 작별할 수가 있었다. 5시간 산행을 하고 나서야 아이리스 번 산장에 도착했다. 오늘 걸은 거리는 14.6km. 침상부터 잡고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산장이 금세 소란해졌다.

오후 들어 비가 그치고 햇살이 들면서 숲과 초원이 확연히 살아나고 있었다. 아이리스 번 폭포로 나들이를 갔다. 규모가 큰 폭포는 아니었지만 오고 가는 길이 무척 예뻤다. 비 온 뒤라 숲에서 싱그러운 내음이 풍겼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고사리 잎과 이끼를 비춘다. 숲이 다시 생기를 찾은 것 같았다. 저녁 무렵엔 케아 몇 마리가 산장을 찾았다. 관리가 허술한 배낭을 찾아 저녁 식사를 나온 듯 했다. 앵무새에 속하는 케아는 부리를 이용해 배낭 지퍼를 열 정도로 영리한 녀석들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사진을 찍으려고 다가오는 사람을 조금씩 움직여 멀리 유인해놓곤 재빨리 날아와 배낭을 열어 먹이를 집어갔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녀석이다.

산장에서 외따로 떨어져 저녁을 먹고 있는 내게 호주 할머니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어느 방향에서 왔냐는 물음에 럭스모어 산장에서 내려왔고 내일 모투라우 산장(Moturau Hut)으로 간다고 답을 했다. 본인도 럭스모어에서 왔다고 했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능선에서 만났던 엄청난 강풍으로 옮겨갔다. 케플러 트랙에서 가장 뛰어난 풍경을 지닌 구간을 비와 강풍으로 인해 그냥 지나친 것이 너무 아쉽다는 내 말에 그 할머니 가라사대, “넌 오늘 케플러 트랙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강풍을 직접 체험한 거야. 축하할 일이지!” 똑 같은 일을 겪고도 생각이 이렇게 다르다. 장쾌한 풍경 대신에 강풍과 비를 맞고도 좋았다니…. 그 할머니 말에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야기 덕분인지 침울했던 마음이 많은 위안을 받았다.

 

셋째 날

셋째 날은 너도밤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걸어 마나포우리 호숫가에 있는 모투라우 산장까지 16.2km를 걸어야 했다. 난 하루 더 묵기 때문에 늦장을 부리다 길을 나섰다. 오늘 전 구간을 끝내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을 한 뒤였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다. 아이리스 번 산장은 계곡으로 내려선 위치에 있어 장쾌한 산악 풍경은 볼 수가 없었다. 곧 폭우가 만든 산사태 지역이 나왔다. 여기선 빅 슬립(Big Slip)이라 부르는 곳이다. 로키 포인트에서 오르막이 나왔지만 대체적으로 길은 평탄했다. 걷는 속도 또한 빨랐다. 로빈(Robin)이라 불리는 새 한 마리가 길에 내려앉아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이 녀석은 사람을 도통 무서워하지 않는다. 로빈의 이런 행동은 사람이 반가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접근에 놀라 달아나는 곤충을 사냥하기 위한 것이다. 자연에선 먹이를 구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네 시간을 걸어 마나포우리 호수를 처음으로 만났다. 산길 옆으로 거대한 호수가 나타난 것이다. 호수가 워낙 커서 파도 소리 또한 우렁찼다. 거기서 30여 분을 더 걸어 모투라우 산장에 도착했다. 길이 좋은 편이라 거리에 비해선 일찍 닿은 것이다. 점심을 먹곤 낮잠도 한숨 잤다. 오후는 무척 여유롭게 보냈다. 여유로움은 좋았지만 시간이 무척 더디게 흘러갔다. 카메라를 들고 몇 번인가 호숫가로 나가 홀로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산장 앞에 있는 모래사장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훌륭했다. 원래 이 호수 이름이 모투라우였는데 백인들이 잘 못 표기하는 바람에 마나포우리라 불린다고 한다. 한때 여기에 댐을 건설하려던 움직임을 무산시키곤 대신 200m 낙차를 이용해 호숫물로 발전을 하고는 지하 터널을 통해 바다로 내보낸다 한다. 모두 헛톡 시간에 레인저에게 들은 이야기다. 대낮부터 낮잠을 잔 탓인지 밤에 잠을 이루지 못 하고 꽤 오래 뒤척거려야 했다.

 

넷째 날

케플러 트랙을 끝내는 마지막 날이다. 마나포우리 호수로 나가 일출을 지켜보았다. 다이나믹한 일출이 연출되진 않았다. 사람들이 먼저 출발하길 기다려 뒤늦게 움직였다. 쉘로우 베이(Shallow Bay)에 잠시 들렀지만 이정표에 적힌 산장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제완 다른 각도에서 호수를 감상하고 트레일로 돌아왔다. 보드워크를 걸어 케플러 늪지에도 들렀다. 전반적으로 길이 평탄해 걷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테아나우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와이아우 강(Waiau River)이 눈에 들어왔다. 강폭이 꽤나 넓었고 엄청난 수량에 유속도 빨랐다. 한 시간 조금 넘어 강 위에 다리가 놓인 곳을 통과했다. 다리를 건너면 레인보우 리치 주차장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일정을 마치곤 셔틀버스를 이용해 테아나우로 돌아간다. 그럴 경우 전 구간을 돌지 않고 9.5km의 거리를 단축할 수 있다.

와이아우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마지막 구간은 좀 지루했다. 레인보우 리치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탓인지 숲길이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조용한 숲을 홀로 걷다가 조금 심심하다 싶으면 나무 사이로 강이 보이기도 했다. 세 시간 가까이 걸어 첫날 출발점인 케플러 트랙 주차장에 도착했다. 드디어 3박 4일의 일정으로 케플러 트랙을 모두 마친 것이다. 자축하는 의미로 스틱을 들어 만세를 불렀다. 셔틀버스를 예약하지 않아 한 시간 동안 테아나우까지 걸어야 했다. 뉴질랜드에선 두 번째로, 남섬에선 가장 크다는 테아나우 호수를 바라보며 걷는 아름다운 길이라 힘은 들지 않았지만 지루함까지 모두 떨치지는 못 했다. 나무와 숲이 있는 산길보다 땡볕을 받으며 걷는 비포장도로가 더 사람을 지치게 한다. 갈증을 해소할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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