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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숲길

 

역사와 신화가 깃든 오름

서귀포시 표선면 영주산

글 사진 · 이승태 편집위원

 

‘영주산(瀛洲山)’은 진시황과 한 무제가 불로불사의 영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다는 삼신산 중 하나다. 또 예로부터 신선이 산다고 여기던 곳으로, 우리 선조들은 이 삼신산의 이름을 본 따서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서귀포시 표선면의 성읍마을 뒤에 솟은 오름 이름도 영주산이다. 그런데 한라산의 별칭인 영주산을 하나의 오름 이름으로 붙인 것을 보면 그만큼 중요하고 귀히 여겼던 오름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군자의 풍모를 닮았다

조선 태종(1400~1418)은 본래 목사 한 명이 전체를 관할하던 제주도를 세 지역으로 나누고 각각 관리를 파견했다. 한라산을 경계로 그 북쪽은 제주목이라 하여 목사를 두었다. 산의 남쪽은 다시 동과 서로 나눠 동을 정의현, 서를 대정현이라 칭하고 각각 현감을 두었다. 이것이 제주삼읍이다. 영주산은 정의현의 현청이 있던 성읍의 뒷산이다. 성읍을 감싸듯 솟은 영주산이기에 풍수지리를 중요시 여기던 조선의 관료들이 여느 오름보다 더 특별히 대접했을 게 뻔하다. 이 오름에 한라산의 별명을 붙여 격을 달리해 불렀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영주산은 해발 326m, 오름 자체의 높이가 150m쯤으로, 남동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분화구를 가졌다. 크루아상의 양끝을 둥글게 말아 붙여놓은 모양으로, 가부좌를 튼 군자의 풍모도 닮아 중후하고 묵직한 인상을 준다. 또 주변에 경쟁할 만한 다른 오름이 없어 그 존재감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때문에 오름을 걷는 내내 주변 조망은 거침이 없다.

남동쪽으로 트인 굼부리를 끼고 발달한 굵은 능선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원형으로 이어진 탐방로여서 출발지점에서 양쪽 어디로 방향을 잡아도 좋으나 동쪽인 오른쪽으로 올라 남쪽으로 내려서는 게 일반적이다. 외관상 꽤 높아 보이지만 오르내림이 사납지 않고 탐방로가 지나는 풀밭을 따라 구슬붕이와 꽃향유, 당잔대, 솜방망이, 무릇, 이질풀, 꿀풀 같은 우리 들꽃이 철따라 펴 걸음이 즐겁다.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

처음엔 잔디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르다가 곧 나무계단이 나타나 능선에 닿기까지 길게 이어진다. 오르면서 보는 계단은 끝없이 하늘로만 뻗은 모습이다. 최근엔 색칠까지 해 놓아 길은 하늘에 걸린 무지개 같다. 사람들은 이것을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라고 부른다. 계단이 나타날 즈음부터 주변 풍광은 거칠 것 없이 뻥 뚫린다. 한 계단씩 밟아 오를수록 눈물겹게 아름다운 제주 풍광은 한 뼘씩 넓어진다. 높고 평평하며 풀만 우거진 거친 들판인 ‘뱅듸’와 숨 쉬는 땅 ‘곶자왈’ 사이로 한라산 동쪽의 기라성 같은 오름들이 불쑥불쑥 솟은 저 앵글은 볼 적마다 가슴을 떨리게 한다. 저기는 백약이, 그 옆은 좌보미, 뒤는 높은오름, 오른쪽은 동검은이, 또 개오름과 비치미, … 이름을 짚어가며 제주 지형을 살피는 재미를 무엇에 비할까!  

처음 영주산을 올랐을 때만 해도 7~8부 능선부터는 온통 초지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린 소나무가 많이 보인다. 여느 오름과 마찬가지로 영주산도 점점 숲이 되어가는 모양새다. 숲이 울창해지는 게 뭐가 나쁠까만 제주 오름, 특히 화구벽을 이루는 능선에서는 숲이 야속하다. 오름에 올라 살피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제주 풍광이 점점 가려져 가기 때문이다.

제주의 여느 풀밭오름 대부분이 그렇지만 영주산도 주변 목장의 방목지 역할을 한다. 당연히 산길엔 소똥이 흔하다. 그래서 풍광에 취해 원경만 보고 걷다간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소똥이 참 정겨우니 난 천생 촌놈인가 보다. 게다가 오름에선 말똥이나 소똥을 만나야 진짜 오름 같다. 오름에서 만난 우마의 배설물에선 똥 냄새는 안 나고 오름 냄새만 난다.

 

오르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세상

평평한 능선을 이루는 정상쯤엔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이곳에 서니 사방으로 제주가 가득하다. 동쪽으로 모구리오름과 유건에오름을 지나 성산일출봉이 멋들어지고, 그 남쪽 벌판엔 풍력발전기가 늘어선 익숙한 제주풍광이 펼쳐진다. 서쪽으론 수없이 많은 오름들 뒤에 한라산이 언제나 그렇듯 듬직하다. 오르지 않고는 만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진짜 제주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영주산이 가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다. 한 시간 남짓이면 탐방을 마칠 수 있는 영주산이지만, 능선에서 마냥 시간을 보내고 싶어지는 이유다.

내려서는 길에 정의현 현청이 있던 성읍마을이 손바닥처럼 훤하다.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초가지붕들이 이파리와 넝쿨 속에 제 몸을 숨긴 박 같다.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제주에선 오름과 뱅듸를 뒤덮은 띠와 억새를 베어다 지붕을 얹었다. 그래서 4~50년 전만해도 한라산을 제외한 제주 대부분 지역이 민둥산이고 초지대였다. 그러던 것이 초가지붕이 함석으로 개량되고 양옥으로 바뀌는 사이 쓸모가 덜해진 억새와 띠는 점점 사라졌고, 오름과 뱅듸는 나무로 뒤덮이며 울울창창한 지금의 제주가 되었다.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모두 그리움이 되는 것일까. 자꾸만 숲으로 덮여가는 영주산에서 사진으로 본 초지대 시절의 영주산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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