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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숲길

 

전쟁의 아픔을 감싼 자연의 아름다움

서귀포시 안덕면 다래오름(월라봉)

글 사진 · 이승태 편집위원

 

‘월라봉(月羅峰)’은 서귀포시 안덕면의 군산과 산방산 사이에 언덕처럼 자리한 오름이다. 기슭에 명승으로 알려진 안덕계곡을 거느렸으며, 높이는 201미터. 옛 사람들은 ‘다래오름’이라 불렀다. ‘다래’란 우리나라 산중에서 나는 덩굴나무의 열매인 ‘다래’나 하늘에 뜬 ‘달’ 또는 ‘達(달)’이라는 설이 있다. <오름나그네>의 저자 김종철 선생은 이 중 ‘達(달)’이 가장 유력하다고 했다. ‘높다’ 또는 ‘산’이라는 뜻을 가진 고구려어에 뿌리를 둔 말로, 높은오름이라는 해석. 허나 실제로는 눈길을 끌만한 높이가 아니다. 단순한 외형에 따른 이름이라기보다 일대 주민들에게 평범치 않은 의미를 지녀서 붙은 이름이라 여겨진다는 게 김종철 선생의 해석이다.

 

박수기정은 월라봉의 한 부분

제주의 오름 중에는 이름 끝에 봉(峰 또는 烽)이나 산(山), 악(岳)이 붙은 곳이 몇 있다. 이 중 봉화 봉(烽)자가 붙은 곳은 대체로 해안가에 솟은 오름으로, 군사상의 위급한 일을 서울로 알리는 통신장치인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봉우리 봉(峰)으로 바뀌며 산 이름이 되는 경우가 있다. 수산봉과 당산봉이 그렇다. 월라봉은 양옆의 군산과 산방산보다 낮아서 봉수대를 설치하기엔 적절치 못하다. 래오름이란 예쁜 이름이 일제강점기 때 바뀐 것일까? 현재론 확인할 길이 없다. 서귀포시 신효동에도 월라봉이 있지만 걷는 즐거움이나 풍광의 아름다움을 따질 때 이곳 안덕의 월라봉이 더 나아 보인다.  

다래오름은 행정구역상 안덕면 감삼리에 있지만 그 품은 화순리와 대평리에 걸쳐 있을 만큼 커다란 산체를 가졌다. 래오름은 제주올레 9코스를 걷다가 만나는 깎아지른 해안절벽을 품고 있다. 월라봉의 남쪽이 이 절벽으로, 월라봉의 일부를 바다가 집어삼킨 모양새다. 절벽 위쪽엔 ‘박수기정’이라는 드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다. 고려 때 여기서 말을 키워 원나라로 보냈다는 곳이다. ‘박수기정’의 박수는 ‘바가지로 떠 마시는 샘물’이고, 기정은 ‘벼랑’의 제주방언이니 ‘바가지로 떠 마실 수 있는 샘물이 솟는 높은 절벽’이란 뜻이다.

 

결7호작전의 무대

월라봉 들머리는 세 곳이다. 제주올레 9코스(대평-화순올레)가 월라봉을 감싸며 지난다. 올레길을 따르면 대평포구에서 화순항까지 긴 거리를 걸어야 한다. 짧게 월라봉만 다녀올 수도 있다. 북동쪽의 한밭농장을 지나 오르거나 남서쪽 창고천에서도 길이 나 잇다. 창고천 쪽이 수월하다. 화순항에서 화순삼거리로 이어지는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오름 이정표가 보인다. 이 길 따라 300m쯤 간 곳에서 창고천 위에 걸린 ‘개끄리민교’를 건넌다. 곧 한 채의 민가 뒤로 월라봉 등산 안내도가 나타나고, 여기서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된다.

목재데크가 깔린 완만한 경사의 탐방로가 칡이 뒤덮은 넓은 묵밭을 지나 개활지로 접어든다. 여기서 데크가 끝나며 산길이 시작된다. 곧 계단이 나타나지만, 큰 힘 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부드럽게 뒤틀어지는 계단길이 끝날 즈음 갈림길을 만난다. 이 길은 정상부를 길쭉하게 한 바퀴 도는 원형 탐방로여서 양쪽 어느 방향으로 가도 좋다. 오른쪽을 추천한다.

월라봉은 두 개의 희미한 말굽형 분화구를 가졌다. 북동쪽 군산 방향으로 트인 분화구가 크고, 남서쪽으로도 우묵하게 벌어진 굼부리가 보인다. 정상부 북동쪽 분화구는 우거진 수풀로 조망이 막히고 길도 없다. 월라봉 풍광의 대부분은 남서쪽 굼부리 방향으로 펼쳐진다. 탐방로 곳곳에서 만나는 화순과 산방산, 송악산, 중문 쪽 조망이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다. 시야가 트이는 곳에 전망대나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쉬어가기도 좋다.

이렇듯 남쪽바다를 손바닥 보듯 훤히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보니 일제강점기 말,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밀리던 일제는 이곳을 요새로 삼았다. 1945년,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가미가제 특공대로 대변되는 ‘결7호작전’을 펼쳤는데, 이는 일본 내 여섯 개 지역과 일본 외 한 개 지역을 합친 일곱 개 지역에서 준비한 결호작전이다. 일본 외의 한 곳이 제주도였다. 미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높은 곳에 견고한 방어기지를 구축하려고 제주도 남쪽의 오름과 해안 절벽에 수없이 많은 포대와 토치카, 벙커, 해안동굴을 만들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길

이 작전에서 월라봉은 더없이 중요한 곳이어서 봉우리 북서쪽 상단부를 따라 일곱 개의 동굴이 뚫렸다. 이 중 주진지 동굴은 관통형으로, 폭과 높이가 4미터에 길이도 80미터나 된다. 출구를 여러 방향으로 만들어서 유사시 대피할 수 있게 한 것은 여느 오름의 진지동굴과 흡사하다. 내부의 연기를 배출하고 공기를 순환시키기 위해 비스듬하거나 수직으로 통기구멍을 뚫어놓기도 했다. 정상에서 이 배출구를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오름의 동굴 입구가 아무런 보강시설이 없는 것에 비해 월라봉의 동굴은 입구를 콘크리트로 튼튼히 만들었다. 그만큼 이곳이 중요했다는 방증일 게다. 그 흔적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동굴의 상태도 비교적 온전해서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그러나 안전을 위한 보강시설이 되어 있지 않기에 주의해야 한다.

그 사이 무심코 지난 듯한 세월이 상처를 뒤덮으려는 걸까? 전쟁광들이 드나들던 동굴 입구엔 온갖 꽃이 흐드러지고, 어떤 곳은 천장이 무너져 그 사이로 녹나무가 자라기도 했다. 또 다른 동굴 벽은 수없이 많은 양치식물이 뒤덮어 식물원에 온 느낌이다. 자연은 언제나 이렇듯 평화와 아름다움을 향해 나가는데, 그것을 볼썽사납게 바꾸고 망가뜨리는 건 인간이다.

전쟁을 준비하며 판 대부분의 동굴 입구는 화순과 어우러진 산방산과 그 앞바다를 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풍광은 제주를 대표할 만큼 아름답다. ‘전쟁과 평화’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 제주 서부지역 일대의 전쟁유적지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월라봉은 일제의 씻을 수 없는 만행과 더불어 평화의 섬 제주의 현재 위상을 잘 확인할 수 있는 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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