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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문의 벽 _ 설악산 미륵장군봉

 

아아, 그 시절 서려있는 미륵장군봉이여!

글_최석문(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사진_주민욱 기자

 

“1990년 8월 26일, 곤하게 잠든 대원들이 깰 까 조용히 일어난다. 남보다 먼저 보고 싶은 욕심에 계곡에 오르니 바위는 어제 내린 비로 온통 폭포를 이루고, 한껏 그 자태를 뽐내며 의젓하게 내려다본다. (중략) 1차 정찰 당시 본 미륵장군봉은 나를 위해 남은 마지막 바위처럼 느껴졌다. 당시의 설레는 마음은 지금도 진정할 길이 없다.” - 『타이탄 산악회 50년』 중 등반가 최철산의 글 일부 발췌.

58년 개띠인 최철산 선배가 청년 등반가 시절 처음 미륵장군봉을 보고 느꼈을 감정들이 느껴진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 큰 벽에는 코락길만 개척돼 있었다. 거대한 빈 도화지였던 것이다. 40중반을 넘긴 필자도 아직까지도 미지의 벽을 바라보면 어디로 올라갈까 등반선을 그리고는 하는데, 30대 초반 용기가 충만하고 경험이 무르익어갈 무렵 이 벽을 보고 가졌을 느낌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이후 한가위길(1990년 개척)을 시작으로 노총각(1991), 타이탄(1994), 카르마(2001), 타이탄50(2017)에 이르기까지 타이탄 산악회에서 미륵장군봉의 개척을 주도했다.

 

미륵장군봉의 연대기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될 것이고 기상 예보를 확인하며 보내야 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장마가 오기 전 설악산 미륵장군봉을 찾고 싶었다. 도로가 좋아져 서울에서 2시간이면 설악산 장수대에 도착할 수 있다. 인수봉이나 선인봉을 가도 1시간 정도 소요되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먼 곳이 아니다. 수도권에서 2일 정도 설악산 등반계획을 가지면 첫날은 이곳에서 등반하고 다음날 외설악으로 가는 등반팀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미륵장군봉은 월요일에 신청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 있는 암장이다. 약속한 장소에는 오늘 취재를 함께 할 강병영, 문성욱, 임승현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필자가 처음 미륵장군봉을 찾은 것은 1999년 8월이었다. 지금과 다르게 들머리에 출입금지 지역이라는 이정표가 없었고 접근로는 조릿대로 빼곡해 사람을 마주치면 피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운치 있던 길이었다. 지금은 몇 포기만 듬성듬성 남아 옛날 조릿대 가득했던 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할뿐이다. 석황사터를 지나는 길은 바위로 접근이 좀 더 빠르게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륵장군봉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용한 암장이었다. 점차 스포츠클라이밍, 인공등반, 리지 코스가 하나둘 개척되면서 대중화되었다. 현재 미륵장군봉은 총 11개의 루트가 개척돼 있으며 울산바위, 장군봉, 적벽과 함께 설악산을 대표하는 암장이다.

2001년에 최철산 선배가 미륵장군봉에 개척 후 마땅한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길이 있었다. 당시 최철산 선배가 필자에게 어떤 이름이 좋을까 물었을 때, 필자는 카르마(Karma)를 제안했고, 그렇게 이름 없는 길은 ‘카르마길’이 되었다. 추석 연휴에 개척해서 명명된 ‘한가위길’, 노총각 등반가들이 개척해 전국의 모든 노총각 등반가들과 먼저 간 총각 악우들에게 바친 ‘노총각길’, 미륵장군봉과 타이탄 산악회와의 인연, 등반가들이 암벽을 오르는 알 수 없는 이유 등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이 ‘카르마’였던 것이다.

 

등반의 즐거움은 오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00년 이후 많은 루트가 개척되었지만 필자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은 언제나 타이탄 산악회에서 개척한 루트들이다. 전통 등반의 숨결이 살아 있는 루트들이라고 해야 할까? 등반을 하고 나면 가슴 한 곳이 뿌듯해지고, 뭔가 해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필자가 특히 더 좋아 하는 루트는 타이탄길과 한가위길인인데 등반선이 좋고 등반의 특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루트들이다. 미륵장군봉에 도착하니 이른 시간임에도 타이탄길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등반하고 있어 취재진은 한가위길로 가기로 했다. 타이탄길 출발 지점에서 우측으로 가다 완만한 바위사면을 오르면 한가위길 출발지점이 나온다.

1년 만에 온 미륵장군봉의 그세 바뀌어 버린 풍경에 깜짝 놀랐다. 기존에 루트를 알리는 첫볼트에 달려있던 손으로 새겨 놓은 아담한 철판이 콘크리트를 잔뜩 뒤집어 쓴 채 벽에 붙어 있었다. 루트 출발 지점을 알리려 벽에 시멘트로 붙여 놓은 표지석을 보고도 깜짝 놀랐다.

때때로 필자도 루트 안내를 위해 강돌을 주어 루트명을 써놓는 일을 하지만 바위에 붙이거나 바위에 페인트로 글씨를 쓰지는 않는다. 외국에서는 바위색과 볼트색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도색을 한 볼트를 사용하기도 한다. 루트를 알리는 표지석 정도는 등반자를 위한 배려정도로 볼 수 있지만 바위에 페인트로 방향표시를 한 것은 분명 잘못된 문화다.

물론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등반의 즐거움은 오르는 것에만 국한되는가? 어떠한 루트를 가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고 어프로치를 어떻게 하는지 기온과 해가 비추는 시간과 하산이나 하강에 필요한 정보 등 모든 것이 등반자가 해야 하는 몫이자 즐거움이다. 바위의 페인트 표시는 타인을 위한 배려 일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의 즐거움을 뺏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통등반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보수작업

한가위길 1피치는 난이도 5.9정도로 볼트거리가 멀어 추락하게 된다면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는 R(Run out) 등급의 루트다. 보통 볼트거리가 먼 곳은 장비 설치가 되거나 오르기 쉬운 곳이므로 그리 긴장할 필요는 없다. ‘쫄리는 맛’이라고도 표현하는 구간이지만 전통등반에 이런 것이 없다면 재미를 반감하지 않겠는가?

70미터 로프를 이용해 두 피치를 한 번에 오르니 종료지점에 다다를수록 로프 무게가 묵직하다. 필자가 사진촬영을 위한 로프를 걸 요량으로 3피치를 오른다. 페이스와 크랙을 오가며 등반선은 연결되어 있고 등반길이 또한 30미터를 넘는 구간이 있어 등반할 맛이 난다.  

오랜만에 취재에 동행한 문성욱씨(바위를 찾는 사람들)와 이명희씨(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는 작년에 이곳 타이탄길과 한가위길을 부분 보수했었다. 한가위길 4피치 출발지점 링볼트가 있는 지점에 볼트를 교체했고, 등반선이 많이 꺾여 로프 유통이 힘들었던 마지막 볼트를 왼쪽으로 옮겨 설치해 로프 유통이 한결 좋아졌다.

사실 필자는 이미 완성되어 등반하기 시작하는 루트에는 볼트를 더 설치하는 일들을 하지 않는다. 개척자와 선험자들의 등반을 통해 검증된 루트에 새로운 확보물을 추가 한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모르겠다. 온라인상의 글들을 보면 타이탄산악회에서 개척한 루트들은 대부분 볼트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해서 몇 해 전에 보수 작업을 했다. 보수 이후 등반자들이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전에 느꼈던 등반 느낌은 사라졌다. 전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로 하지 않는 루트가 되었다.

2년 전 최철산 선배로부터 개척등반 이야기를 듣고 그때 보수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개척자 선배를 대신해 보수를 하긴 했지만 그때 볼트를 좀 더 적게 설치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요즘 대부분의 등반 루트들은 하강하며 등반선을 찾고 볼트를 박아 루트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장점도 있지만, 반면 루트가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단점도 분명 있다.

하지만 타이탄 산악회에서 개척한 길은 밑에서 올라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서울과 미륵장군봉을 오가며 보낸 많은 시간과 열정, 크랙이 끊기는 곳에서 다음 크랙으로 가기 위해 수없이 용기를 내고 때로는 포기하고 다시 오르는 일을 반복해 만들어 냈던 등반 루트들에 그들의 시간과 용기가 담겨있다. 그들의 도전이 서려있는 길에 상처를 내는 일을 한 것에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이다.

 

타이탄길 5피치 디에드로 크랙 사이로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마지막 피치를 남겨둘 쯤 인제 쪽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그래도 멋진 이 구간을 올랐으니 로프를 내려도 아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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