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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문의 벽 _ 숨은벽

 

억수로 안고 싶은 숨은벽 첫 바위

· 최석문(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사진 · 주민욱 기자

 

경칩이 지나면 빙벽은 생기를 잃어가고 저절로 바위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3월의 북한산은 등산로 주변에 잔설과 결빙구간이 아직 남아 있다. 암벽등반을 하기에는 좀 이르다 할 수 있겠지만 등반가는 달력의 숫자를 보고 등반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첫 바위 등반은 으레 볕이 잘 들고 바람이 불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겨우내 잃어 버렸던 발의 감각과 손끝에 걸리는 화강암의 까칠한 느낌을 빨리 일깨우고 싶어 첫 바위로 북한산 숨은벽 암장을 즐겨 찾는다.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들에게 ‘숨은벽’하면 떠오르는 첫 이미지는 ‘멀다’이고, 그 다음도 ‘멀다’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숨은벽은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매력이 있는 대상지다.

 

전통은 그래도 이어진다

‘전통등반(traditional climbing)’이란 말은 스포츠 클라이밍이 생기기 이전까지는 없던 말이었다. 새로운 등반방식이 생겨남으로써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등반이라고 잘하지 않고 기존바위 또는 기존등반이라고 부른다. 전통등반은 직접 확보물을 설치하며 등반함으로 위험성이 많이 포함돼있다. 그런 이유로 모험등반이라 부르기도 한다.

요즘 기존바위(전통, 트래디셔널 등반)를 하는 젊은 등반가들을 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선 전통 등반이란 것이 이름에서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 ‘전통’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 관습, 행동 따위의 양식’. 한창 에너지가 넘쳐나는 청년들에게 전통이란 단어는 그 자체로 숨 막히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몇 시간씩 걸어야 하고 더운 날이면 땀범벅이 되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의지가 꺾일 수 있다. 장마철이면 길게는 몇 주간 바위 한 번 만져보지 못하는 날이 허다하다. 그리고 가끔은 추락해 다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등반을 즐겨하는 젊은 친구들이 이번 취재에 동참하기로 했다.

3월 9일 토요일 아침 우이동에서 조근진, 이수항, 김우경씨를 만나기로 했다. 첫 바위이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후배들과 함께하는 취재라 약속장소로 가는 길 내내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후배가 함께 차에서 내리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 입국한 조안나씨였다. 어머니와 함께 울릉도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우이동에 깜짝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필자를 놀라게 하려고 깜짝 이벤트를 했다.

그녀와의 인연은 2017년 11월 프랑스 그레노블에서 시작됐다. 2016년 강가푸르나 원정대가 프랑스 황금피켈상 특별상을 수상해, 고(故) 김창호 대장과 박정용씨, 그리고 필자는 현지 시상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안나양은 자원 봉사자로 참여해 원정대 통역을 담당했다. 붙임성 좋고 밝고 쾌활한 안나양은 우리 모두를 삼촌이라 불렀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학업 중임에도 시간을 내어 그레노블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었다.

우리의 인연은 프랑스보다 일찍 히말라야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인 고(故) 조중호 산악인은 어택캠프 회사의 대표였는데, 85년 강가푸르나(Gangapurna 7,455m)와 안나푸르나 3봉(AnnapurnaⅢ 7,555m) 종주 등반 원정대에 참여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당시에 이러한 등반을 생각했다는 것만으로 선배 산악인들의 역량과 등반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같은 해 그녀의 어머니 이소민씨도 가네시히말(Ganesh HimalⅠ 7,406m) 원정대에 참여했다고 한다. 네팔에서 만난 인연으로 두 사람은 결혼했고, 딸의 이름을 ‘안나푸르나’의 ‘안나’라고 지었다.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 그 어딘가

숨은벽은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에 있는 암릉이다. 숨은벽이란 명칭은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에 가려져 숨어 있는 듯 잘 보이지 않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암릉은 경기도 고양시 효자동 방면이나 사기막골 방면에서 보면 조망이 아주 좋다. 몇 년 전 숨은벽 고래 바위 아래에 루트를 개척하면서 밤골이나 우이동 방향에서도 다녀봤지만 백운산장을 지나오는 길이 가장 가까운 듯했다.

숨은벽은 주로 크랙을 따라 루트가 개척되어 있다. 등반 안내 책자에는 숨은벽 7번까지 나와 있지만 사장된 루트들이 있다. 2017년에 필자는 문성욱, 안종능, 이명희씨와 함께 숨은벽 가장 오른쪽에 사장된 루트를 개수했다. 이 루트는 북한산 일원에서 상위 10위 안에 들만큼 루트가 아름답고 난이도가 높으며 자연스러운 등반선을 따라 등반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크랙 등반이 익숙하지 않으면 어려울 수도 있으니 여분의 캠을 많이 챙겨 가길 권장한다. 2017년에 개수한 곳뿐만 아니라 왼쪽으로도 선배들의 옛 등반 흔적이 녹아든 피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크랙에 흙으로 막히고 풀이 자라 등반하기에는 곤란하지만 확보물을 정비하고 청소를 한 후 지금의 등반 방식으로 탈바꿈한다면 분명 좋은 등반지가 될 것이다. 크랙 등반을 좋아하거나 관심이 많다면 숨은벽에서 등반해 보길 권장한다.

5.8에서 5.11까지 비교적 어렵지 않는 난이도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 초급자가 훈련하기 좋은 핸드 크랙이 많이 발달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라 기다리거나 번잡하지 않는 곳이다. 최근 슬랩과 짧은 루트 몇 개가 추가되어 더 다양하게 등반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아직 3월의 아침 기온은 조금 쌀쌀했지만 바람이 없고 낮 기온도 높아질 거라 하니 취재에는 더없이 좋을 듯했다. 사진 촬영이 용이한 숨은벽 5번으로 로프를 설치하기로 하고 올해 첫 바위등반을 시작했다. 해가 드는 바위면은 손이 시리지 않는데 크랙 속에 손을 넣으니 아직 겨울의 냉기가 숨어 있었다. 손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니 피가 순환되고 더 이상 손이 시리지 않았다.

두 피치를 한 번에 끊으니 등반할 맛이 난다. 우리나라 루트들은 한 피치가가 보통 30미터 이내지만 외국에서는 50미터가 넘는 루트들이 많이 있다. 작년 9월 미국 트라우트 크릭 등반 이후로 처음 하는 암벽등반이라 몇 미터는 손 감각과 발 감각이 없더니 십여 미터를 오르니 이내 돌아왔다. 이후 첫 피치 종료 지점이 나왔지만, 끊지 않고 이어서 올라갔다. 두 번째 피치 종료지점으로 가다 로프가 짧으면 크랙 중간에 확보지점을 만들 요량으로 계속 등반을 이어 나갔다. 역시 등반이 쉬우면 쉬운 대로 즐겁고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즐거운 것 같다. 어느덧 60미터 로프가 1미터도 남지 않고 로프가 끊남과 동시에 확보지점에 도착했다. 필자의 등반은 이것으로 끝냈다.

 

최고의 등반가의 자격

취재에 동행한 청년 클라이머들의 등반을 감상하는 일만 남았다. 이명희, 이수항, 조안나씨가 여자들끼리 로프를 묶었다. 갑자기 이명희씨가 부러워졌다. 내심 나도 조근진, 김우경씨와 로프를 묶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의 등반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띠 동갑도 넘는 맏언니 명희씨의 선등으로 등반이 시작되었다.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던 이명희씨는 후배들과의 등반이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닌가 보다. 피치마다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어느덧 셋은 숨은벽 능선으로 사라지고 빈 바위 위로 쪽빛 하늘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정말 얼마 만에 보는 맑은 하늘인가? 평범하고 익숙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고 지냈는가 보다.

네 명의 청년 등반가를 보고 있으니 등반하지 않아도 함께 오르는 것 같다. 이들은 아직 등반이 세련되지 않고 겁도 나고 가끔 용기를 잃어 뒤돌아 설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등반이랍니다. 그러니 마음껏 즐기세요. 그리고 동료와 자연을 존중하고 등반과 자신을 사랑하는 당신들은 이미 최고의 등반가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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