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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영과 걷는 지리산권역의 산 ④ _ 전남 광양 백운산

 

봄꽃 보러 왔다가

눈꽃 보고 갑니다

 

혹한의 겨울도 버텨낸 몸이 요란한 봄을 견디지 못하고 옴팡 감기에 걸려버렸다. “소영씨도?!”라고 묻는 걸 보니 누군가 또 시름시름 앓는 모양이다. 매번 박식한 지식으로 취재산행의 수장이 되어준 영진씨 표정이 좋지 않다. 약을 8일째 먹고 있는데도 좀체 나아질 기미가 없다고…. 감기와 사랑과 이별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당연히 봄이라 믿었다가 차가운 춘설과 조우한 그해 3월처럼 말이다.

 

글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백운산(1,218m)은 광양시 봉강면·옥룡면·옥곡면·진상면·다압면, 구례군 간전면에 위치한 산으로 전라남도에선 노고단(1,507m) 다음으로 높은데다 호남정맥의 정점이 되는 봉우리다. 초입으로 삼은 진틀은 지리산 중산리 같은 곳이다. 정상까지 오르는 최단 코스이며, 숯가마터를 기점으로 원점회귀가 가능하다.

계곡을 건너 비탈로 올라서자 까슬한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능선이 보인다. 산위를 오가는 구름과 물안개가 꽃처럼 얼었구나, 싶었는데 고도가 높아질수록 등산로마다 눈이 한 가득씩이다. 주섬주섬 아이젠을 꺼낸다. 섬진강 매화는 어여쁜 꽃잎을 피었다. 차창을 열면 탁한 공간 속으로 새콤한 향이 밀려들었다. 이미 천 년 전부터 ‘따스하게 빛나는 햇살’이었던 광양(光陽), 그 곳의 산은 꽃소식엔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겨울이다.

 

백운산 상봉과 신선대

억불봉(997m)을 버리고 상봉으로 간다. 능선의 눈은 기대와는 달리 절반 남짓 녹았다. 진작 올 걸, 조금만 더 빨리 올 걸…. 예정에 없던 계절의 교집합 속에서 마음이 서글프다. 뚝뚝, 눈물처럼 떨어지는 눈덩이가 아까워 어쩔 줄을 모른다. 머리 위로 따스한 햇살이 쏟아졌다. 반팔 셔츠를 입은 사내가 가볍게 웃으며 지나간다.

백운산 상봉은 좁은 바위 봉우리다. 대다수 지도엔 1,222m로 표기됐지만 돌에 새겨진 숫자는 여전히 1,218m다. 예부터 백운산에는 봉황·여우·돼지의 영험한 기운이 흐른다고 전해진다. 봉황의 정기는 조선시대 문신 최산두, 여우는 몽고의 왕비가 되었다는 월애부인, 돼지는 ‘큰 부자의 땅’인데 광양시는 이를 포스코, 컨테이너 부두, 도내 재정 자립도 1위와 연관 짓는다. 신성한 기운 때문에 타지로 시집간 광양 새댁들은 부러 친정까지 와 출산한다는 말이 있다. ‘광양의 죽은 송장 하나가 순천의 산 사람 셋과 맞먹는다’, ‘광양 큰 애기한테는 두말도 않고 장가든다’ 등 광양 사람의 끈기와 강한 생활력, 치밀성과 실천력을 두고 나온 말이 적지 않다. 백운산에 서면 산의 품새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회색을 섞은 푸른 가스층 위로 25.5km의 지리산 주능선이 가지런히 솟았다. 서쪽의 노고단과 동쪽의 천왕봉(1,915m)도 새하얗다. 능선 사이사이 골골이 파인 계곡과 아스라이 보이는 바다 풍경 속에서도 지리산은 고고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인증샷’을 찍던 이들도 등 뒤로 펼쳐진 위용 앞에서 묻어뒀던 감탄을 쏟아낸다. 지리산, 특히 하동(악양)에서 보는 백운산과 백운산에서 보는 지리산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꼭 빼닮은 피붙이처럼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섬진강은 이 산과 저 산 사이에 놓인 강이다.

비좁은 정상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고 데크로 내려선다. 간밤 하룻밤 묵었는지 빨간 텐트 한 동이 데크 위에 남았다. 국립공원이 아니어서 아직은 통제 밖 야영이 가능한, 하여 백패킹을 즐기는 이들이 사랑하는 산이기도 하다. 밤이면 정상을 오르내리는 계단에 불이 켜진다. 해발 1천미터의 산중에서 저 아래 반짝이는 불빛을 친구 삼아 하룻밤 묵어가기 좋은 곳. 곧 오를 따리봉도 반대편 노랭이봉과 그 일대도 백패커들에게 인기가 높다. 누군가의 장난 같은 말처럼 ‘7성급 야영지’가 즐비한 산, 그러나 샘터가 귀한 건 흠이다.

커다란 바위 아래서 숯가마터~신선대로 올라온 이들과 마주친다. 일부는 상봉에서 신선대로, 일부는 신선대에서 상봉으로, 길 하나에 산뜻한 등산복 차림의 인파가 엉겨 붙는다. 신선대 계단은 1인용이다. 사람이 없을 땐 상관없지만 꽃이 피는 봄철 주말은 사정이 다르다. 수십 명 단체 산행객이 줄줄이 이어지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정상목 사진 촬영은 말할 것도 없다. 매끄럽게 뻗은 고동색 나무는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을 옆에 두고 표정 없는 얼굴로 카메라 세례를 받는다. “자, 다 찍으신 분은 내려오세요.” 그 다음에 찍을 사람이 순서를 기다리며 재촉한다.

분주함과는 상관없다는 듯 신선대는 견고하고, 그 위의 하늘은 유독 파랗다. 좁다란 공간을 벗어난 산꾼은 장쾌한 능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산에 와서 우울한 사람은 없다. 높은 곳에 올라선 이들은 새떼처럼 가볍고 활기차다. 탁 트인 신선대와 어둑한 바위 그늘을 지나 한재로 향한다. 상봉과 신선대를 벗어나면 산은 감쪽같이 조용하다.

 

한재에서 따리봉까지

한재는 차도 다닐 수 있는 포장 임도다. 순천에서 왔다는 자전거 동호회 회원들이, 아마도 논실에서 올라와 간전과 화개의 경계인 남도대교 쪽으로 내려설 모양인데 “언제까지 쉬실 거예요?”라고 묻는다. 적당히 쉬었으면 빨리 가라는 뜻이다. 자전거를 타고 온 이들에게 벤치를 내어주고 배낭을 멘다. 한재부터 따리봉까지의 1.3km는 확고한 오르막이다. 상봉과 신선대를 거쳐 오느라 부실 체력을 탕진한 감기 환자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보폭은 겨우 15cm쯤, 대여섯 걸음마다 숨고르기, 멀어지는 선두의 그림자를 넋 놓고 쳐다보기, 스윽슥 추월해가는 몇몇 산행객을 부럽게 바라보기…. 뒤돌아서면 걸어온 봉우리가 눈을 덮어쓴 채 어서 가라고 등을 떠민다. 천천히 조금씩 발을 옮겨 따리봉 삼거리에 닿는다.

한재와 따리봉, 또 밥봉으로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서 밥봉 쪽으로 가면 북바위재~하천산(691.2m)을 지나 남도대교까지 가닿는 약 12km의 능선 산행이 가능하다. 따리봉은 겨우 0.1km에다 지금껏 걸어온 오르막과는 달리 편한 오솔길이다. 오후 2시를 넘겼으니 한낮 햇살에 눈이 죄다 녹을 법도 한데 이 길엔 용케 눈덩이가 남았다. 백운산권역 중에서도 따리봉 설경을 제일로 치는 이들이 많다. 명성은 괜히 얻는 게 아닌 모양이다.

따리봉 데크에 배낭을 내리고 뒤늦은 점심식사를 한다. 패딩을 덧입지 않아도 뺨을 만지는 바람이 차갑지 않은데, 저 너머로 보이는 산은 여전히 겨울이다. 정지아가 쓴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엔 “당세가 약해 전체 병사를 통솔하기 어려웠던 14연대는 순천 점령이 예상보다 늦어지자 구례 진격을 포기하고 광양을 거쳐 백운산을 넘어 지리산에 입산”했다. 또 “원래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곡성 등 다섯 개 반란지역은 이현상이 지도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현상이 주로 14연대와 지리산에서 활동을 하는 바람에 지도가 불가능해지고 전남도당 역시 장흥군 유치면에 있어 지리적으로 반란지역에 대한 통제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백운산에 반란지역을 지도할 특수지구를 신설”했다고 적고 있다. 화순 백아산에 있던 빨치산 전북도당과 사령부가 백운산으로 옮겨온 건 산자락의 품이 그만큼 넓었기 때문이란 얘기다. 김지회를 주축으로 한 반란 세력이 백운산에 입산하면서 남한 빨치산은 본격화 되었다고 한다.

 

참샘이재 지나 논실로

도솔봉까지 갈 생각이었지만 감기 환자가 둘이나 있으니 곧장 논실로 하산하기로 한다. 하산을 결정한 이상 서둘 필요가 없다. 뜨거운 커피를 컵 안 가득 담고 한적한 따리봉에 앉아 두런두런 꽃을 피운다. 남들보다 먼저 보려 했던 백운산 봄꽃은 언감생심, 꽃보다 반가운 춘설조차 설경이라 하기엔 역부족, 봄꽃과 눈꽃을 뛰어넘는 이야기꽃으로 텅 빈 아쉬움을 달랜다. 돈의 가치와 여행, 가장의 무게와 삶의 다양성, 지독히도 추웠던 한겨울 야영과 산마다 찍힌 젊은 날의 조각들, 요즘은 ‘늙지 않는 게 유행’이라는 시답잖은 농담까지…. 등줄기가 서늘해진 다음에야 봉우리를 벗어난다.

참샘이재에서 논실은 금방이다. 하산로치고는 경사도 봐줄만하다. 다만 대부분의 길을 바위가 차지한 터라 표지기를 놓치면 길도 함께 시야에서 사라진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연결된 검은 호스가 길잡이 역할을 한다. 광양의 대표적 특산품인 고로쇠 줄이고, 이 줄은 결국 마을로 향할 것이다. 줄을 따라 바위를 짚고 나서니 이제야 제대로 된 길이다. 산행객의 것인지, 고로쇠 작업자의 것인지, 버려진 담배꽁초가 보인다. 한낱 쓰레기조차도 이럴 땐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되어 반갑다. 산 아래에선 산 위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렇게 아랫녘만 놓고 보면 산은 그저 신록을 향해 치닫는 따스한 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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