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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영과 걷는 지리산권역의 산 ② _ 경남 함양 황석산·거망산

 

겹겹의 산줄기,

낮은 하늘에 드리우다

 

북쪽의 남덕유(1,507m)와 남쪽의 천왕봉(1,915m), 거대한 두 산의 씨앗과 핏줄을 받아 장대한 키로 솟은 기백산(1,331m)·금원산(1,353m)·거망산(1,184m)·황석산(1,192m)…. 그 봉우리에 올라서면 스크럼을 짜고 선 군중의 함성처럼 골짜기와 능선에서 들려오는 신비한 바람소리, 산짐승의 포효 같은 떨림이 들리는 듯하다. 하여 이 4개 산을 모두 잇는 종주산행이 보편화 되었지만 시간이 하루뿐이라면 절반씩 나눠 산행에 나서는 게 좋다.

글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코스---유동마을---망월대---황석산---거망산---지장골---용추사

 

전날 지리산을 다녀온 지인에게 “눈이 없다”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던 터라 처음부터 심설산행은 기대하지 않았다. 뉴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터목대피소 식수는 이미 말랐고, 매점에서 판매중인 생수도 품절 상태. 그러니 산행에 나설 예정이라면 반드시 넉넉한 물을 챙겨야 한다는 보도가 산행 전날 TV 화면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은 미친 듯이, 며칠을 두고 내리다가도 거짓말처럼 깊숙이 숨어들었다. 이 정도 눈이면 되었다 싶었던 게 일주일 전인데 그사이, 그나마 쌓였던 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연촌마을에서 황석산까지

본래 출발지는 유동마을이지만 차바퀴를 굴려 길이 끝나는 연촌까지 들어선다. 산행을 하겠다고 먼 길을 달려왔으면서도 종종 걷는 거리를 줄이려 길을 더 압박한다. “이런 길은 재미없으니까.” “하산 시간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지.” 이유는 제각각. 연촌에서 시작할 경우 유동에서 시작할 때보다 0.5km쯤 단축되는데, 적어도 오늘은 그 짧은 거리가 평소보다 열 배쯤 더 절실한 길이 되었다. 결국 랜턴을 켜고 하산했으니 말이다.

전국 각지에서 달아둔 색색의 표지리본을 따라 초입으로 들어선다. 잔설과 낙엽으로 희미해진 길 위에서 거친 숨을 토해낸다. 어찌된 영문인지 출발한 순간부터 다리가 무겁다. “바지 속에 등산 내복 입으셨어요?” 내의를 입으면 답답해서 산행을 할 수 없다는 김진수씨가 장난처럼 묻는다. “제가 추위에 약해서요.” “그럼 어디에 강하세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딱히 강한 덴 없다. 더위에도 약하고, 오르막에도 약하고, 무릎이 부실하니 내리막엔 더더욱 쥐약이다.

적당히 걷다 내복을 벗을까도 싶지만 집에서 미리 하고 온 스패츠를 벗는 것도 일이었다. 무엇보다 바람이 칼칼한 한겨울이지 않은가.

로프가 연결된 암릉을 오르다 돌아서니 능선 위의 길이 확연하다. 나뭇가지의 눈은 모두 녹았지만 땅 위에 쌓인 눈들은 아직도 하얗게 빛이 났다. 앙상한 숲 사이로 흰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등산로가 분명했다. 연촌마을에서 계곡과 능선으로 나뉜 길은 ‘유동마을 2.8km 황석산 1.3km’ 이정표 앞에서 만나는데, 이 능선길을 아래로 더 잇자면 함양 선비문화의 꽃인 화림동 계곡 농월정까지 가 닿는다. 유홍준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덕유산에서 발원한 계류가 흙모래를 다 쓸어내고 골격 큰 화강암바위를 넘으면서 곳곳에 못을 이루고 어쩌다 너럭바위를 만나면 미끄러지듯 흘러내려 아름다운 풍광을 곳곳에 빚어” 놓아 남한 최고의 탁족처가 된 곳….

망월대에 서면 가려진 산하가 일순간 펼쳐진다. 사방으로 거침없는 조망이다. 정수산, 웅석봉, 새봉, 왕산, 필봉산, 법화산, 삼봉산, 화장산 등등. 이름을 알고 있는 산보다 그렇지 못한 산들이 훨씬 많다. 산행 경험이 풍부한 이영진씨가 손을 뻗어 이 산 저 산 이름을 알려주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해도, 딱 그때뿐이다. 상대의 손끝이 어느 봉우리를 가리키는 지 확실치 않을 때도 있다. 산은 어깨동무를 한 것처럼 연이어 붙어 있었다. 속이 훤히 보이는 낮은 산들 너머로, 감추려 해야 감출 수 없는 지리산의 위용이 드러난다. 그 어느 산보다 높고 깊게 드리운 산줄기는 망월대를 출발해 거망산에 닿기까지 내내 이어졌다. 텅 빈 숲이 아쉬웠다. 흐린 날씨도 원망스런 하루였다.

 

조망의 절정에 선 황석산

황석산 좌우로 뻗은 황석산성(사적 제322호)은 “성 안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지은” 포곡식 산성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돌로 쌓은 부분과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부분”으로 이루어졌고, 총 길이 2,750m에 최고 높이는 3m에 달한다. 전북 장수와 진안으로 통하는 영호남 관문 격이며,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가 백제와 대결하기 위해 쌓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유재란(1597년) 당시엔 안의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가 소수의 병력과 고을 백성을 모아 격전을 벌였지만 왜적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만다. 결국 돌을 나르거나 부서진 병기를 손질하며 힘을 보탰던 여인들은 치마로 얼굴을 가린 채 뛰어내려 숨을 거뒀고, 그때 흘린 피로 붉게 물든 피바위가 아직도 산성 아래 남았다.

성곽을 따라 돌아서면 황석산과 거망산 갈림길이다. 한쪽에 배낭을 내리고 황석산으로 오른다. 간간히 돌풍이 불면서 몸이 휘청댄다. 어쩌면 아침에 먹고 온 약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정상에 오른 이들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망월대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저 아래 남봉 석성 위를 걷는 산행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지럽다. 웅웅대는 바람이 사방에서 불었다. 그것은 마치 얼굴을 가리고 산 아래로 뛰어든 인근 부녀자들의 서글픈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산을 내려선다. 여기서 거망산까진 4.2km다.

 

거망산 지나 지장골로 하산

“북봉은 암벽 능선으로 위험하니 우회”하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우회하는 길도 편한 건 아니다. 나무 밑동에 매어진 파란 로프를 잡아보지만 잔설 덮인 바윗길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연촌을 출발할 때부터 “거북바위만 지나면 힘든 길은 다 끝난다!”라고 격려하던 선두의 말처럼 이후론 대체로 무던한 능선길이다. 말라붙은 억새가 배낭에 부딪힌다. 황석산~거망산은 은신치 일대까지 이어진 억새숲 덕분에 가을 산행지로 인기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장자벌 갈림길을 지나 거망산을 1km쯤 남겨둔 지점부터 내리막이다. 초반에 체력을 너무 탕진했는지 눈길 위에서 자꾸만 발이 헛돈다. 아이젠을 착용할 시점이다. 엉덩이를 아예 눈밭에 깔고, 장갑을 벗고, ‘체인젠’의 탄력 고무를 힘껏 당겨 등산화 뒤꿈치에 건다. 연신 찝찔한 콧물을 훌쩍대며 걸었지만 갈증을 해소해줄 양은 아니다. 보온병을 꺼내 적당히 식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곧 잘록한 안부 삼거리에 닿는다. 지장골로 하산하려면 거망산 정상엘 갔다가 다시 여기로 내려와야 한다.

배낭을 이정표 앞에 세워두고 거망산에 오른다. 산 꼭대기엔 성인 남자보다도 큰 거대한 정상석(擧網山)과 무릎 높이의 아담한 정상석이 나란히 서있다. 마음만 수망령~금원산~기백산으로 보내두고 삼거리로 내려선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등 뒤의 능선이 빗금을 친 듯 선명하다. 해는 한 달 전보다 길어졌지만 낮고 두터운 구름 때문에 몸이 느끼는 어둠은 그보다 빨랐다. 거망샘에 들러 물을 채우고 하산을 서두른다.

지난달 다녀온 웅석봉 딱바실골에 비하면 ‘양반’인 지장골은 그때보다 추워진 계절 탓에 단단히 얼어 있었다. 어스름한 골짜기는 미끄러웠고 폭포는 새파란 빙판이 되었다. 이마에 헤드랜턴을 건다. 랜턴 불빛은 가야 할 길만 비추었다. 어둠에 싸여 볼 수 없는 지장골의 진면목은 다음으로 미뤄둔 채 마지막 물길을 건넌다. 비포장도로로 나섰을 땐 이미 오후 6시를 넘긴 후였다. 랜턴 불빛에 기백산 등산로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도 기백산을 올라가네요. 14년 전엔 용추폭포에서 올랐었는데….” “여기가 용추폭포에요.” 이영진씨의 랜턴이 숲 한쪽을 가지런히 비추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물소리도 잠잠하다. 세상은 일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조금 더 걸어 나오자 그제야 ‘용추’라는 상호를 건 식당과 펜션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분명 다녀온 곳이 맞다. 다녀온 산은 맞지만 그것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면 처음 온 것과 다르지 않다. 하필 그 잊힌 기억이 어둠 속에 잠길 건 뭐란 말인가. 강산이 한 번 하고 절반쯤 더 변해버린 그 옛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이 길을 올라 4개산 종주를 마쳤던 과거의 나와 2개산을 겨우겨우 마친 현재의 나는 엇박자 같은 걸음으로 기억에서 지워진 길을 머뭇머뭇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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