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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 PCT(Pacific Crest Trail)를 가다③

 

빅 베어 시티(Big Bear City)~이글 로스트 피크닉 에어리어(Eagles Roost Picnic Area)

199.6km(총 운행 거리 627.8m)

 

이 몰아친

눈 덮인 을 넘다!

글 사진 · 최인섭(서울시청산악회, 전 서울시산악연맹 이사)

 

Jim에게도 역마살이

짐과 걷기 시작한 지 1시간 지나 도블 PCT 트레일 캠프(Doble PCT Trail Camp)에 도착해 오늘 운행을 마친다. 잠자리를 마련한 후 저녁을 지어 먹기 전, 마트에서 산 연어를 구워 짐에게 먼저 권했다. 집어 먹기 좋게 큼직큼직하게 썰어 놓았으나, 짐은 그놈을 다시 조그맣게 잘라 딱 한 점만을 집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의 나이는 42살, 사는 곳은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 스토턴(Stoughton). 건축 리모델링 일을 하다가 PCT를 걷기 위해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고 했다. 2년 후에 배낭을 메고 혼자 남미를 여행하고 싶단다. 미혼이며 결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모르긴 몰라도 짐에게도 나처럼 역마살이 다분히 껴있는 듯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 빅 베어 시티 상황을 알렸더니, 바로 돌아오란다. 아내는, 특히 PCT협회에서도 현재 운행 중인 하이커들에게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해 달라’라는 권고를 하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고 전했다. 아내의 말에 심각성을 느꼈지만, 주로 산속에서 지내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조금 더 두고 봐야겠다 싶었다.

운행 23일째 아침이다. 해발 2천 미터가 넘다보니 여전히 춥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 일찌감치 아침식사 중인 딱따구리 소리, 자동차 지나다니는 소리가 묘하게도 협주곡을 이룬다. 이른 아침 숲속 풍경이다. 길은 빅 베어 시티와 그 옆 빅 베어 호수를 왼쪽에 두고 계속 서쪽으로 이어진다. 날이 맑고 푸근해 녹은 눈으로 길이 질퍽거린다. 흥미로운 현상을 하나 발견했다.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코딱지와 눈곱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푸른 숲으로만 다니며 맑은 공기를 마셔서일까.

 

8일 동안 눈밭을 걷다

짐은 덩치가 크고 보폭이 넓어 그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다. 그는 삼거리가 나올 때마다 눈밭에 화살표를 그려 갈 길의 방향을 잡아주며 나를 챙긴다. 조그만 체구의 동양인이 그 먼 길을 걷는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도움을 주고 있다. 따사로운 봄볕이 눈 위에 내려 앉아 눈을 녹이고 있다. 하늘 위쪽엔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바람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출발 후 6시간이 지나지 않아 17.6km를 걸었다. 제법 속도가 붙은 걸음이었다. 리틀 베어 스프링스 캠프(Little Bear Springs Camp)를 지나서부터는 내리막이라 시속 4km로 걸었다. 녹초가 될 무렵 짐이 말한다.

“0.8마일만 더 가면 좋은 텐트 사이트가 있으니 오늘은 거기서 야영을 하자”

오늘 하루에 40km를 걸었다. 스스로도 기특했는지 짐은 웃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시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해발이 계속 낮아지니 눈의 흔적이 없다. 밤이 되니 상황은 반전, 밤새 추위에 떨었다. 배낭 속에 있는 두 겹 김장용 비닐 안에 침낭을 넣어 무릎 아래나마 추위를 덜었다. 그나마 눈밭을 벗어났다 생각하니 한시름 놓는다. 8일 동안 눈밭을 걸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다시 만날까 솔직히 두렵다. 체력소모와 추위가 큰 적이었다.

거의 강 수준의 큰 계곡에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있다. 봄 소풍을 나온 듯 유치원 꼬마들이 강에 돌을 던지며 사진을 찍는다. 멀지 않은 곳에 도시가 있는 모양이다. 300마일 표지석을 만났다. 기온이 거의 한 여름 수준으로 올라가니 그늘을 찾게 된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추위에 떨었는데 벌써 그늘이라니. 짐이 먹는 행동식을 유심히 관찰했다. 다섯 가지 종류의 참치 팩에 치즈를 잘라 넣어 먹는다. 이네들이 먹는 방식을 따라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방식의 먹을거리는 균형 잡힌 영양과 먹는 즐거움을 준다. 307.9마일 지점에 노천 온천(Deep Creek Hot Springs, 땅속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보인다. 짐이 설명을 하며 물에 손을 담그고, 내게도 해보라 한다. 따뜻한 물이다. 온천하기 좋은 온도지만, 규모가 작아 발만 담글 수 있다. 계곡이 계속 내리막이어서 4시간 이상 힘 들이지 않고 제법 먼 거리를 걸었다. 앞서 가던 짐이 되돌아온다.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 밭이고 길이 아니라고 한다. 큰 냇가 옆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눈 때문에 플랜 B를 생각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짐과 앞으로 일정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케네디 메도우즈까지 가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크램폰, 아이스 피켈, 겨울 등산화를 준비해 2주 후에 다시 케네디 메도우즈로 복귀해 PCT를 계속 걸을 계획이야.”

“난 마이크로 스파이크(동계용 아이젠)만 있어. 만약 케네디 메도우즈부터 눈이 쌓여 있다면, 점프해서 워싱턴으로 가서 완주한 후, 다시 돌아와 씨에라(Sierra, 캘리포니아 중부) 구간을 운행할 생각이야. 또는 아구아 둘쎄(Agua Dulce, 스페인어로 ‘달달한 물’이란 뜻)에서부터 느릿느릿 걸으며 씨에라의 눈이 녹을 때를 기다릴 생각이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짐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눈이 많이 쌓여있고, 4~5월에도 폭설이 내린다. 걱정이 앞선다. 더군다나 코로나 역병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내 염려는 더 크다.

25일 만에 처음으로 큰 개울을 건넌다. PCT 길이 개울을 건너 이어진다. 발을 얼릴 만큼 차다. 짐이 먼저 건넌다. 멀리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높은 산이 보이는데 짐은 ‘저 산이 샌 안토니오(San Antonio)이며 저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한다. 9천 피트가 넘고 사흘 정도 걸린다니 고생할 일이 생기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씨에라 지역은 해발 3,000m 이상 되는 고봉이 수두룩하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요 고개다. 사흘 동안 기온이 내리 30도 이상 올라 산을 덮은 눈이 모조리 녹아내리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다.

 

첩첩산중에서 피자와 맥주

하이웨이를 끼고 산허리를 걸으며 농촌 마을을 지난다. 초원엔 젖소들이 따사로운 햇볕 아래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나른한 오전을 보내고 있다.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 마을과 소가 시간을 멈추려는 듯 평화롭다. 공장 앞 나무 아래 그늘에 앉아 점심 겸 휴식을 취한다. 짐은 뭘 끓여 먹더니, 나무에 기댄 채 이어폰을 꽂고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음악을 듣는다. 여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짐이 내게 참치 팩 3개를 보여주며 하나를 고르라 한다. 참치와 클리프 바(Clif Bar)를 함께 먹으니 달달한 맛과 신맛이 잘 어우러진다. 하기야 어느 음식인들 맛이 없으랴! 다음에 음식물을 준비할 때 참치 팩 하나 추가다.

실버우드 호수(Silverwood Lake) 주위로 길이 이어진다. 1시간 반 이상 호수를 보며 걷는다. 몇몇 가족들이 여기저기에서 이른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보트 시설이 있는 걸 보니 이 호수는 휴양지처럼 보인다. 수면은 윤슬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물빛은 파랑이 아닌 비취색과 옅은 에메랄드빛을 잘 섞어놓은 듯했다.

클래그혼 피크닉 지역(Cleghorn Picnic Area)에서 묵기로 했다. 자전거 라이더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화장실과 샤워장이 있지만, 시즌이 아닌지 모두 잠겨있다. 볕이 좋아 양말과 옷가지를 빨아 널었다. 짐이 어디에다 전화를 한다. 피자 큰놈과 맥주를 주문했단다. 세상에! 첩첩산중에서 피자와 맥주를 먹을 수 있다니 놀랍다. 배달로 치자면 배달의 민족을 따라오는 나라가 있을까 싶었는데 미국이 다크호스다. 마중을 나간 짐이 대형 피자와 캔 버드와이저 5통을 들고 온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식은 방귀를 꿔도 모를 만큼 입에 착착 감긴다. 먹는 시간만큼은 쾌락 그 자체다.

어머니께 전화해 지금껏 잘 걷고 있으니 염려 마시라 했다, 암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친구에게도 전화를 걸어 내 발걸음이 극복의 동력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 친구는 “병을 이겨내고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고 싶다.”고 했다. 병마에 의연하게 대처하며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친구와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는 희망을 품는다. 꼭 현실로 다가오길 바라며.

 

난생처음 보는 이구아나 같은 도마뱀

3월 마지막 날. 내겐 특별히 상징적인 날이다. 이날 사실상 공무원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제출한 명퇴 서류가 제대로 접수됐는지 궁금하다. 내일부터 난 그 어떤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된다.

점심때쯤 되면 15번 바스토우 프리웨이를 지난다. 길은 계속 내리막이어서 속도가 빠르다. 오후 1시쯤 편의점에 들러 이틀 치 식량을 준비했고, 맥도널드에 가 6개 세트 햄버거와 콜라를 사 먹는다. 어제 그토록 맛있게 먹었던 피자는 축에도 들지 못할 만큼 기가 막히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삽시간에 3개를 먹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자동차 지나다니는 소리가 그야말로 소음이다. 매일 풀벌레 노랫소리, 새들의 지저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개울물 소리, 하늘로 흐르는 바람 소리 등 온갖 자연의 소리만을 듣다가 만난 문명의 소리는 분명 소음이었다.

앞서가던 짐이 갑자기 빨리 와서 보라며 손짓을 한다. 난생 처음 보는 녀석이다. 도롱뇽보다는 크고 등짝은 흡사 남미에 서식하는 이구아나를 닮았다. 온몸이 무기 같다. 짐은 녀석의 이름을 모른단다. 녀석은 커다란 포유류 두 마리가 자기를 잡아먹기 위해 탐색 중인 줄로 알았는지 꼼지락 달싹도 하지 않은 채 숨죽이고 있다. 여차하면 자신이 가진 뾰족한 가시로 저 두 마리 포유류들을 사정없이 찔러대기라도 하듯이. 물병이 가득 들어찬 하이커 박스 주변에서 야영을 한다. 이틀 치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라이트우드에서 꿀맛 같은 휴식을

4월이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만개하는 시절이 아니던가.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낮은 캘리포니아 남부 지역엔 아직도 눈이라니. 오늘은 해발 900m에서 2,640m까지 올라야 한다. 1,700m 고도차이지만 길은 결코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으며 지그재그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걷는 이들에게 큰 부담이 없다. 다만 멀기만 할뿐. 짐이 카메라 렌즈를 옷소매로 닦기에 헝겊 안경닦이를 한 장 줬다. “옷소매로 닦으면 렌즈가 상해!” 짐에게 점수를 조금 땄다.

해발이 높아지면서 눈이 점점 많아진다. 눈이 녹으며 신발 안으로 들어가고 신발은 물로 찌걱찌걱 소리를 낸다. 발가락이 시리다. 동상에 걸리지 않을까 저어된다. 3일 전에 보았던 흰 눈을 인 산이 코앞에 있다. 사흘 동안 매일 30km 이상씩 걸었으니 100km는 족히 온 셈이다. 지금 상황은 샌 하신토 산을 넘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저 눈들이 하루 이틀 만에 폭삭 녹아버린다면 좋으련만 자연의 이치가 어디 그런가. 그저 때가 되면 눈은 녹기 마련이고 길은 자연스럽게 드러날 테지. 뒤돌아보니 멀리 샌 하신토 산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체력이 좋은 짐이 처음부터 끝까지 앞장을 서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나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 손쉽게 길을 걷는다. 드디어 라이트우드 시내로 내려가는 삼거리에 닿았다. 해발 2,513m다. 에콘 트레일 루트(Acorn Trail to Wrightwood)를 따라 시내로 내려간다. ‘도토리길’ 이란 이름이 매우 정겹다. 도토리를 열매로 갖는 참나무科 나무가 많은 길인 듯하다. 급경사다. 눈이 무릎까지 찬다. 1시간 30분을 걸어 내려와 캐넌 크릭 인(Canon Creek Inn)에 짐을 풀었고, 짐이 전화로 이용료 결제를 한다. 방 하나에 하루 20불. 전화 한 통으로 다 해결한다. 코로나 역병 시기에 이런 호사를 누린다. 숙소 인근 대형 마트(Jensen’s Finest Foods)에 가 캔 맥주를 샀고, 레스토랑에서 멕시코 음식을 테이크아웃 해 왔다. 맥주를 마시며 짐이 말한다. “이틀 쉰 후 점핑을 할 거야. 신발이 부실하고 텐트도 추위에 약해 저 흰 산을 넘을 자신이 없어.” 짐과 헤어져 3천 미터 가까운 눈 산을 혼자 넘어야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과 외로움이 앞서며 갑자기 풀이 죽는다. 라이트우드의 밤이 조금은 을씨년스럽게 흐른다.

이튿날 마운틴 하드웨어에 가 침낭 안에 넣을 수 있는 린더(Linder)를 샀다. 얇은 울 천으로 침낭처럼 몸을 두를 수 있다. 침낭 안의 온도를 몇 도쯤 올릴 수 있는, 말하자면 보완재다. 6일분의 식량을 준비했다. 도착 지점은 아구아 둘쎄. 그전까지는 상점도, 마트도, 스토어도 없다는 말을 짐이 한다. 앞으로 3일쯤 높은 지대를 넘으면 아구아 둘쎄까지는 무리가 없을 거란 얘기도 덧붙인다. 다행히 내일부터 맑은 날이 이어진다. 짐과는 PCT 길 어디쯤에서 꼭 다시 만나자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까마득한 길 위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일이 말처럼 그리 쉬울까?

 

바덴 포웰 산에 오르다  

커피를 마신 후 짐과 작별 인사를 하고 산길로 향한다. 도토리 길을 따라 오른다. 길이 이틀 전과는 판이하다. 그새 눈이 제법 녹았다. PCT로 이어지는 삼거리에서 등반 장비를 갖춘 두 친구들을 만났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친구들과 이야길 나눈다. 안토니오 산을 오른단다. 이후 5시간 눈밭을 걸었다. 길은 눈으로 덮여 계속 앱을 확인하며 방향을 찾을 수밖에 없다. 경사 심한 곳이 많고 길을 잘못 들어 일일이 다시 찾다보니 무척 애를 먹었다. 오후 6시 넘어서 엔젤 크레스트 하이웨이 주차장(Vincent Gap)에 배낭을 풀었다. 10시간 30분 동안 21km를 걸었다. 눈길에 끊임없이 빠지는 통에 걸음은 더뎠고 체력은 두 배 이상 소모. 작업복 차림인 친구에게 물이 있으면 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1.5리터의 물과 캔 맥주 한 개를 내민다.

운행 30일째. 맑은 날씨에 바람도 잔다. 자동차 소리에 나가보니 한 친구가 산행 준비를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셸리. 헬멧, 아이스 피켈, 라스포르티바 이중화, 크램폰 등 거의 빙벽 등반 수준이다. 셸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눈밭을 오른다. 앞선 하이커가 없던 듯 길이 보이지 않아 치고 올라갔다. 가파른 경사로 몹시 힘들었다. 12시쯤 바덴 포웰 산(Baden Powell, 2,864.8m) 정상에 올랐다. 다시 삼거리로 내려오니 셸리가 힘겹게 오른다. 그가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 나무는 월리 트리(Wally Tree)로 나이가 무려 1500살이야”

모진 비와 눈바람에 시달렸을 테지만 꿋꿋하고 당당하게 서있다. 그와 몇 마디 나누고는 난 다시 마루 길로 나선다. 500m쯤 경사면을 대각선으로 치고 나갔다. 휴대폰 앱을 보지 않고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눈 처마 부근에서 빠지기도 하고 그늘진 곳으로 가다가 길을 잃고 돌아오기도 했다. 허벅지까지 빠지기는 부지기수. 날은 흐리기 시작하면서 눈가루까지 날린다. 점점 앞이 보이질 않는다. 도저히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종일 걸은 거리는 12km. 평균 해발은 2,400~2,600m. 운행 이후 지금껏 제일 높은 곳에서 야영을 한다. 경사면에 옹색하게 텐트를 치고 얼른 침낭을 편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은 점점 세지고 더 추워진다. 눈을 녹여 저녁을 해 먹다가 물을 엎질렀고 물을 담은 병을 넘어뜨려 텐트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불행은 겹쳐서 온다더니 하나의 부주의가 또 다른 부주의를 낳는다.

 

발은 오른쪽 방향으로 무릎은 왼쪽 방향으로,

‘악’ 소리가 절로

텐트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과 추위로 인한 두려움으로 밤새 뒤척였다. 이 혹한이 무섭다. 오늘도 앱 하나만을 의지한 채 산길을 헤쳐야 하는 이 상황이 비현실이길 바랬다. 안개가 잔뜩 껴 10m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혼자다 보니 두려움과 무서움의 농도가 더 짙어진다. 한 손엔 휴대폰을 들고 연신 길을 찾고, 한 손은 알파인 스틱으로 중심을 잡으며 눈을 헤치고, 능선을 넘으며 한 발 한 발 걸음을 뗀다. 4시간 동안 8.6km를 걸었다. 2번 하이웨이와 만나는 아이슬립 새들(Islip Saddle)을 눈앞에 둔 지점에서 그만 오른쪽 다리가 푹 꺼지며 허벅지까지 빠진다.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허방을 짚은 듯했다. 발의 방향은 오른쪽으로 기울고 무릎은 왼쪽 방향으로 뒤틀렸다. 눈 속에서 다리를 빼내보니 무릎이 부어오른다. 발목을 심하게 삐는 경우와 비슷했다. 걷는데 약간 불편함이 있었지만 걸을 만했다. 새들 주차장에 당도한다. 하이킹 차림의 남녀가 있어 물을 좀 달라했더니 피자 한 조각과 물을 건네준다. 이들은 내가 왔던 길로 거슬러 오른다.

오후 5시, 2번 하이웨이와 만나는 이글 로스트 피크닉 에어리어(Eagles Roost Picnic Area)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지독한 안개에 이슬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빗방울이 굵어진다. 바람이 거세 화장실 벽 가까이 텐트를 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소리가 크다. 빗방울은 눈으로 바뀌며 폭설로 변한다. 침낭 안에 들어가 오른쪽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럽다.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일 아침엔 분명히 다친 부위가 붓고 고통이 더 심해질 텐데 큰일이다. 잠은 오지 않고 걱정만 앞선다. PCT 운행을 포기해야 하나? 포기를 해도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눈은 푹푹 쌓이고 무릎 통증으로 신음소리와 고통도 눈이 쌓이는 만큼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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