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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둘레길③

 

마을에서 마을까지

 

‘섬진강 매화길’은 이름 그대로 길의 대부분이 섬진강, 또 매실나무와 어우러져 이어진다. 하여 매화가 피는 3월에 가장 적합한데, 의외로 하천마을~염창마을~매각마을~직금마을~소학정주차장~청매실농원~매화마을로 이어진 20.3km의 거리가 만만치 않다. 광양시 자료에는 7시간 10분이라고 적혔지만 점심식사와 휴식을 포함하면 8시간은 잡아야 한다. 특히 막판 청매실농원을 넘어서는 길에서 지치기 쉽다.

글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만만하게 본 게 잘못이었다. 2코스(만남이 있는 길) 종점인 하천마을에서 한 달 뒤 걸어야 할 길을 살펴보니 섬진강 옆 861번 지방도로를 따라 쭉 이어져 있었다. 아, 매화마을까지 도로만 걷나보네. 검색창에 입력을 해봐도 백운산둘레길 기록은 없다시피 했다. 광양시청에서 다운 받은 개념도를 봐도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개념도는 개념도일 뿐 실제 펼쳐진 길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걷기 전엔 20km쯤이야, 만만하게 보았다. 지난가을엔 거리가 비슷한 지리산둘레길 오미~난동 구간을 걸었고, 두어 달 전엔 남해바래길 1구간과 2구간을 한 번에 합쳐 걸었다. 길만 좋다면 20km는 너끈히 걷고도 남는 거리였다.

 

다압면 하천리로 가는 길

하천마을로 가는 버스는 광양, 구례, 하동에서 탈 수 있는데 광양은 오히려 배차 간격도 뜸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구례와 하동을 저울질하다 하동으로 결정한다. 자차로 이동하거나 거주지에 따라 더 적당한 곳으로 가면 될 것 같다. 매화가 절정인 3월이라면 이래저래 다압면 일대 도로가 분주할 게 뻔하다. 취재를 다녀온 건 월간지 특성상 2월, 매화가 피었다면 얼마나 예뻤을까. 벌써 하얀 송이를 만개한 나무도 있지만 대부분은 찬 기운을 피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번호 순서대로 걷긴 했는데 어쩌다 보니 딱 매화 절정기인 3월호에 맞춰 ‘섬진강 매화길’을 걷게 된 건 다행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기차를 타고 하동으로 간다. 하동역 코앞으로 이사 온 시외버스터미널 덕분에 이른바 ‘뚜벅이’ 여행자들은 한결 걸음이 편해졌다. 하동발 화개장터행 광양버스(35-1번)는 섬진강 건너 다압면을 지나 남도대교 건너 화개장터로 간다. 출발지와 목적지는 하동이지만 버스가 지나는 대다수 길은 광양 땅인 셈이다. 전남과 경남으로 도는 나뉘었지만 생활권은 친밀한 지역들이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른 버스는 백운산둘레길 3코스 노선 대부분을 지나 서쪽으로 내달렸다. 차창 밖 낯선 풍경을 보는 재미는 좋지만 혹여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칠까 노심초사다. 버스는 친절하게 이번에 정차할 곳과 다음에 정차할 곳을 알려주고 있었다. 멀리 남도대교가 보인다. 하천마을에 다 왔다는 뜻이다. 빨간 벨을 누르고 목적지에 내린다.

한 달 전만 해도 논실과 하천을 잇는 한재 임도는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여전히 늦겨울 세력이 장악한 날이었지만 볕이 드는 남쪽의 땅들은 봄을 향해 치달았다. 몇몇 나무는 이미 꽃잎을 열고 벌들을 모았다. 서둘러 핀 꽃잎은 얼고 녹고를 반복해 제때에 핀 꽃보다 피곤해 보였다. 덕분에 2월에 먼저 걷는 이는 그 꽃에서조차 위로를 얻었지만…. 참, 2코스(12.3km) 종착점이자 3코스 출발점 하천마을은 9코스(함께하는 동행길)의 종점이기도 하다. 백운산둘레길의 마지막 구간인 9코스는 무려 25.4km, 대미를 확실하게 장식할 모양이다.

 

마을과 마을로 이어진 길

하천마을에서 1km쯤 도로를 따르다 횡단보도를 건너 우측 염창마을 오르막으로 길이 이어진다. 사방 2m를 넘어 200m 안쪽에도 인적이라곤 없는 텅 빈 거리지만 너무 추워 마스크를 벗지 못했는데, 내내 멀쩡하던 땀샘이 겨우 오르막 몇 십 미터에 완전 개방 상태로 변한다. 배낭, 정확히는 여행 가방을 내리고 재킷과 그 속에 입은 패딩을 벗는다. 나중 일이지만 이 여행 가방은 결국 화근이 되었다. 그냥 가볍게 걷지, 뭐. 도로 따라 걷는데 배낭은 너무 ‘오버’야! 섣불리 속단한 게 실수였다. 살을 짓누르는 가방의 어깨끈 때문에 몇 곱절 더 힘든 길이었다.

염창마을 다음은 매각마을이다. 마을과 마을 중간, 외딴 오름길 옆에 커다란 바위가 섰다. 토종벌꿀을 놓았다 해서 설통바구, 일제 강점기 땐 김해김씨가 바위에 네모난 홈을 파고 족보를 넣어뒀다 하여 족보바위라고도 불린다. 이 바위를 넘어서면 조금 전까지 바로 옆에 흘렀던 섬진강이 아득히 먼 곳의 풍경처럼 내려다보인다. 강은 동쪽을 향해 흘렀고, 하필 오전 역광이라 사진도 안 예쁘게 찍힌다. 강 너머로 하동군 악양면의 형제봉이 보였다. 두 바위를 잇는 출렁다리가 여기서도 확연할 정도다.

오르막 정상에서 매각마을로 내려서는 길은 더 예뻤다. 산과 산 사이로 흐르는 섬진강은 훨씬 뚜렷했다. 차밭에 선 한 그루 매화나무는 벌써 꽃의 절반 정도를 열고 있었다. 꽃가지 너머로 강을 마주한 작은 마을이 그림처럼 앉았다. 매각마을을 내려서 도로를 따르다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직금마을로 올라선다. 이 마을엔 옥녀샘이 있다. 지나온 매각에도 공동우물이 두 개나 있었다. 직금을 내려서면 또 도로, 구간 초반부는 도로와 산중턱 마을길의 연속이다. 이제부터 약 12km는 내내 왕복 2차선 도로다. 다행히 인도가 있어 위험하진 않다. 인도가 없는 곳은 도로 아래로 길이 이어졌다. 이 길은 백운산둘레길이자 섬진강 자전거 도로이기도 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지를 3시간쯤 걷자니 여간 지루한 게 아니다. 팔각정, 다압면민광장. 송정공원 등 앉아 쉴 곳만 나오면 가방을 내린다. 준비해온 도시락도 먹고, 물도 마시고, 등산화를 벗어둔 채 눕기도 한다. 다압면 중심지를 멀리 두고 길은 강 쪽으로 가깝게 붙어 이어졌다. 수플레치즈케이크처럼 부드러운 강변은 어서 내려오라, 손짓하지만 갈 길이 너무 멀다. 도사모래톱이 있는 길에선 진행에 주의해야 한다. 중앙분리대를 기준으로 인도와 찻길을 구분해 놓았는데, 2차선 도로와는 따로 떨어져 있어 실제 오가는 차들은 많지 않다. 우측으로 소학정마을(0.6km) 이정표가 보인다. 걸어온 방향인데 왜 중앙분리대 너머 찻길 쪽에 있지? 무시하고 지난다. 잘 보이던 초록색 리본이 보이질 않는다. 느낌이 안 좋다. 의아했던 이정표에 아무래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과감히 돌아간다.

 

마의 구간, 청매실농원 뒷산

이정표 바로 앞, 중앙분리대 출구로 나가 자세히 보니 길은 강변도로를 버리고 중심도로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안 그래도 지루했던 길인데 헛걸음한 걸 생각하니 기운이 빠진다. 한편으론 그나마 빨리 되돌아와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둘레길은 마을 앞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의 소학정주차장으로 이어졌다. 주차장에선 쫓비산 등산로 이정표(4.8km)를 따라 올라야 한다. 구간 종점인 매화마을이 4km 남았다. 넉넉히 1시간 20분이면 되겠네, 설레발을 치며 올라섰는데 그 다음 이정표엔 5km(구간 총 거리 21km)라고 적혔다. 뭐, 1km 차이쯤은 괜찮아. 마음을 잡지만 사실 3km 내내 오르막이었다. 이미 16km를 걸어온 다리는 그 3km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졌다. 철퍼덕, 가방을 내리고 주저앉길 몇 번.

지그재그로 이어진 길은 매실 과수원을 가로질러 꼭대기로 향했다. (취재 기준) 2월이라 밋밋했지만 꽃이 피는 3월엔 분명 멋있을 길! 소학정에서 3코스를 끊고, 청매실농원을 4코스(7.2km)로 넣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랬다면 너무 길거나 짧은 두 코스 거리를 적당히 분배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청매실농원을 다음 구간으로 미뤄버리면 ‘섬진강 매화길’이란 구간 이름이 무색해질 것 같단 생각도 든다. 초봄에만 볼 수 있는 꽃이니깐.

여하간 이번 코스의 종점은 홍쌍리 여사로 대표되는 광양의 대표적 매화 관광지 청매실농원이다. 소학정에서 이어진 쫓비산 산길은 매실밭을 지나 이름 모를 산꼭대기에 닿았다가 농원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못해도 2년에 한 번씩은 왔을 농원이지만 꼭대기까지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관광지가 싫다면 앞서 지나온, 섬진강이 예쁘게 보였던 염창마을~매각마을 길을 걷거나 소학정에 주차를 하고 매화꽃 언덕을 올라 역으로 내려서는 것도 좋다. 다압면 일대는 3월이 제일 바쁘다. 인근의 구례와 하동도 3월부터 바쁘다. 훈풍을 타고 꽃이 피면 남쪽은 전국에서 달려온 상춘객들로 정신이 없다.

청매실농원을 나와 도로로 내려선다. 구간 종점은 여기서 오른쪽, 농원 주차장 말고 매화마을 주차장이다. 다음 구간(백학동 감꽃길)을 알리는 이정표도 여기에 있다. 이번에 왕창 걸었으니 적어도 4코스는 여유가 있겠다. 홀로 탄 승객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준 35-1번 버스기사님을 다음 달에도 만날 수 있으려나. 만난다 해도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기억할 순 없을 것이다. 사소한 습관이지만 말도 손짓도 누군가에겐 격려가 된다. 강과 산과 꽃 사이로 멀어진 20여km를 돌아보며 스스로에게도 말해본다. 걷느라 힘들었지? 고생했어! 어쩌면 가장 좋은 친구는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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