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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적 등반가 황욱과

김정태의 <등산 50년>

글 사진 · 이규태(사람과 산 전 편집주간) 

“금강산이 기교로 아름답다면 오대산은 기교가 없이 아름답지요. 높은 산이라 하니 그저 기암괴석으로 된 바위산이나 사태가 남직한 험산으로 여기겠지만, 기실은 뭐랄까 어머니의 품처럼 인자한 산입니다. 그저 부드럽고 인자하고 착하고 다정해보이지요. … 대개 명산이나 고산은 말하자면 앙칼진 인상을 주는데 오대산은 사람에게 압박감을 주면서도 부드러워요. … 산악에서 여러 날 천막을 치고 오대산부터 설악산까지 백여 리를 바로 갔지요.”

1937년 신문 인터뷰할 때 황욱(黃澳)의 말이다. 릿쿄대(立敎大) 유학 시 산악부에서 암벽등반을 배운 것으로 알려진 황욱은 1926년 30세 만학으로 릿쿄대 졸업 후 중앙고보에 영어교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양정고보로 옮겼다. 월파 김상용(‘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시인)의 영문과 1년 선배로 나이는 7살 위다. 신문 인터뷰 시 ‘김군’이라 칭하면서 ‘5척 단신이나 절벽도 잘 오른다.’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황욱, 1930년대 초에 등암술 강연 등 산악활동 펼쳐

황욱은 1930년 여름 민세 안재홍, 일민 윤홍열, 수주 변영로, 김찬영, 성순영 그리고 김상용과 16일간 백두산에 갔는데 참여자는 모두 당대 지성으로 그의 사회적 교류의 격을 알 수 있다. 이 등반의 산행 리더였다는 말도 있다. 안재홍은 조선일보 주필이었고 「백두산 등척기」를 조선일보에 34회로 연재하고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1933년 10월 개성에서 개최된 행사에서 황욱은 ‘등암술(登岩術)과 민족성’ 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고 김상용은 ‘세계 등산열과 산악미’를 강연했다. 다음날은 천마산(북한) 등산이 있었다. ‘등암술(登岩術)과 민족성’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암벽등반기술과 민족성을 연결한 것이 흥미롭다. 행사를 주최한 고려청년회체육부는 ‘조선체육회’(조선인들이 결성한 체육단체인) 또는 산하조직으로 보인다.

1934년 7월 「여름과 여행. 근교의 피크닉처」란 기고문에서 “서울 부근의 산은 대개 3~4번 안 들어가 본 골짜기가 없고, 못 오른 봉우리가 없어 제집 정원이나 다름없이 되었다”고 했고, 1935년 7월 「록크라이밍과 그 지식」이란 기고문에는 “암벽등반 대상지로서 서울 부근 북한산 인수봉과 노적봉, 도봉산 만장봉 외 몇 봉우리, 백운대 경우 동남쪽이고 전국으로는 설악산과 금강산이 제1후보지”라고 소개했다. 1937년엔 「하이킹」을 기고했다.

1935년 황욱은 임학선(배재고보), 박래현(조선산악회), 한산수(YMCA), 이용원(동아=동아일보인 듯), 전유량(철도국), 그리고 조선체육회 소속의 박영진, 김용구와 ‘산악구락부’를 설립했다. 설립취지문에는 “그동안 너무 산을 연구하지 않았고… 동계 산악을 정복하고…”라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마지막 설립과정에서 ‘서울스키구락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는 지금의 대한체육회 전신으로 상급단체인 조선체육회와 협의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35년 12월 ‘서울스키구락부, 개골금강을 정복’이라는 신문보도도 있었다. 그러다가 전시체제로 전환된 1938년, 조선체육회가 관제단체인 조선체육진흥회에 통합 당했다. 그해 황욱은 43세로 양정고보를 퇴임하고 낙향해버렸다. 이후 북쪽 박물관 운영에 관여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또 다른 취미는 옛화폐(동전) 수집이었는데 월간지에 진품 수집가 탐방기사가 소개되기도 했다.

1937년 3월 잔설기에 양정고보산악부가 지리산 등반을 성공하자 각 신문은 ‘쾌거’로 크게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5회에 걸쳐 리더인 최기덕 학생의 등반기를 연재했다. 1934년 활동을 시작하고도 학교의 승인은 받지 못하다가 지리산 등반 후 비로소 승인을 받고 예산도 배정 받았다. 초대 지도교사는 황욱. 양정산악부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학교산악부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1937년 조선산악회에 가입한 김정태

김정태(1916~1988)는 황욱(1895~?)보다 21년 뒤진 인물이다. 김정태 초등학교 입학 전, 방학으로 귀국한 황욱은 평양 근교 산에서 암벽등반을 했다. 14세 김정태가 사촌형을 따라 마닐라삼줄로 인수봉을 등반할 때 35세 전문산악인 황욱은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나면 등반전용 하얀 로프를 메고 홀로 산으로 갔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도발과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으로 사회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정부가 직접 통제했다. 1931년 조선산악회(일본인 단체)를 설립한 이이야마는 “1938년 이후 조선에서 무심코 산에 가는 것은 완전히 비국민적 취급을 받았다. 어둠의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어떻게든 산으로 가야했다.”고 회고했다.

모두가 산에 가기 힘들게 되자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류가 자연스러워졌다. 백령회(한국인 단체)가 1938년에 설립된 것도 이러한 사회적 맥락과 궤를 같이 한다. 김정태 등 4명은 백령회 설립 전 1937년에 ‘조선산악회’에 이미 가입했었다.(<등산 50년> 213쪽) 일본인 중엔 백령회 멤버와 등반하는 사람도 있었다. <등산 50년>은 김정태의 자서전적 등반사인데 출간 시부터 문제점이 지적되었으나 자료 부족 등으로 갑론을박으로 그치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자료들이 발굴 연구되고 있다. 황욱에 관한 사항도 그 중 하나다. 21년의 나이차가 있다 하더라도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산악인으로 모를 리가 없건만 <등산 50년>에는 일체 언급이 없다.

김정태는 당시 등반기술에 관한 정보가 없어서 “극장에서 상영된 <몽블랑의 폭풍>, <마의 은령>이란 독일영화를 몇 번이고 침을 삼키며 보면서 거기에 잠간씩 비추는 매듭법, 확보법을 익혔다”고 했지만 1930년 무렵은 등산 붐을 이루던 시기였다. 김정태의 등반파트너 엄흥섭은 김정태를 만나기 전에 이미 조선산악회원들로부터 등반기술을 배웠다. 정보 수집의 한계는 김정태 개인의 문제였지 산악계 전체의 상황은 아니었다. <등산 50년>이 등산사의 소중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개인적 시각, 또는 자신의 등반기록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 아쉽다.

1941년 12월~42년 1월, 이이야마와 이시즈케, 이시이가 주축이 되고 구로다 박사 부부(부부 산악인)와 그의 조수를 학술팀으로 한 조선산악회의 백두산 등반에 관한 등반사적 평가를 예로 든다. 이 등반에 백령회 멤버인 김정태, 주형열, 양두철, 유재선이 참가했다. 조선산악회가 주관하고 준비한 등반에 위 4인은 이미 가입한 바 있는 조선산악회 회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그때는 조선인 팀만으로 백두산에 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에 산만 생각하는 산악인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이 등반은 많은 고생 끝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성공한 등반’으로 김정태 개인으로도 가장 화려한 등반성과였다.

등반을 총 지휘한 조선산악회 회장 이이야마(김정태보다 12살 위)는 “이 등반을 위해 본토에서 최신 장비를 들여왔고, 다츠미(辰海泰夫, 김정태의 일본명으로 계획서나 보고서에 기재된 이름)는 정찰대 리더로 용감했고, 캠프에서 독특하게 흥겨운 노래로 사기 진작에 일조했다”고 회고했다. 이시즈케는 북해도제대 출신으로 본토에서 활약한 베테랑 산악인이다. 이시이는 김정태에게 스키를 가르쳤고, 자신의 철공소에 김정태를 근무시키고 후원했다. 등반은 이이야마와 이시즈케가 주도했다. 구로다 박사팀은 등반대의 명분을 살리고 예정대로 도중에 철수했다.

김정태는 이 등반에 관해 “내가 생각하는 백두산다웁게 남이 하지 못한 등반성을 갖추어… 계획을 추진시켰다… 백령회 측이 이시이를 대장으로 추천했다”면서 마치 조선산악회와 백령회의 합동등반인 듯 표현하면서 백령회 멤버가 등반을 주도했다(김정태 자신을 의미)고 했지만, 이는 이이야마의 회고와는 아주 다르다. 등반대는 백두산 등정 마지막 날까지 계속된 악천후, 체력 소진, 일정 지연으로 정상 등정만 할 것이냐 천지까지 갈 것이냐 고민하다가 파티를 둘로 나누어 A조는 이이야마를 리더로 천지로 내려갔고, B조는 이시즈케를 리더로 정상으로 향했다. B조는 정상 등정 후 바로 하산을 개시했다. A조는 천지에서 1박하고 다음날 쾌청해진 가운데 정상 등정 후 B조와 합류했다. 김정태는 A조.

김정태는 이이야마에 관해 조선산악회 회장이라는 말없이 ‘사진 담당’ 대원으로 “세찬 설한풍은 여전히 전신을 아프도록 때리는데 사진작가인 이이야마는 이 지경에서 초인적으로 활약, 나를 놀라게 했다. …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우모장갑을 벗어 제치고 얇다란 목면장갑만 낀 채 연신 셔터를 눌렀다. 당연히 그의 손은 금방 동상으로 얼어붙었다. … 참으로 매섭고 ‘앙칼지다’ 싶기까지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선구적 산악활동 펼친 황욱에 대한 연구 바로서야

김정태는 <등산 50년>에서 자신의 등반을 일제강점기 조선인과 일본인이 산에서 펼치는 전투적 민족대결로 묘사하면서 승리한 조선인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2020년 11월 국립산악박물관이 발행한 <산악연구2>에 실린 논문에서 오영훈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회고가 실제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반영하는지 … 한국 근대등산의 ‘원류’를 한·일간의 경쟁으로 정의하려했다는 사실 자체를 주목한다. … 한국산악회의 초기 방향설정과 이후 사업에 핵심역할을 했던 김정태의 등산 경험(의 회고)과 그의 주관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황욱에 관한 일도 그렇다. 영어교사로 후학을 가르치면서 릿쿄대 유학 시 습득한 전문등반기술을 바탕으로 산악관련 기고와 강연, 산악단체설립을 통해 산악활동의 바람직한 방향을 찾고자 노력했던 황욱. 김정태보다 앞서 우리 근대등산에 선구적 활동을 펼쳤지만 그에 관해 침묵했다. 이것이 김정태의 사회적 안목이나 대인관계의 한계인지, 아니면 의도적 무관심인지 모르겠다. 그의 관점이나 역사관과 무관하게 〈양정산악70년>에 ‘선구적인 등산가 황욱 선생’ 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연하고 합당한 평가다. 지금부터라도 황욱에 대한 더 많은 연구를 통해 평가가 바로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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