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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께하는

 

, 그리고 정계

글 · 이종헌(인문기행 작가)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역사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삭막한 도시에 살면서 우리 몸의 요구에 잘 따라주지 못한 것들, 예를 들면 상쾌한 공기, 파란 하늘, 시원한 물줄기, 그리고 아름드리나무 등을 자연 속에서는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복잡한 일상을 잠시 뒤로 미루고 근교의 자연 속으로 길을 나서면 마치 소풍을 떠나는 어린아이처럼 저절로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새소리도 들으며 이른바 힐링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게 경험하다가 뜻밖에 오래된 무덤이나 바위 글씨, 비석 등 역사의 흔적들을 만나는 것은 덤으로 주어지는 기쁨이다.

약 4~5년 전에,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가 우연히 ‘산성정계(山城定界)’라는 바위 글씨를 발견한 적이 있다. 제8구간 ‘구름정원길’ 삼천교 부근 암벽에 새겨져 있는 각자(刻字)인데, 당시만 해도 글자의 마멸이 심하고, 또 마지막 글자의 하단부가 보행자용 데크에 가려져 있어서 판독이 쉽지 않았다. 며칠 후 필자가 속해 있는 와운루(한국등산사 연구회) 회원들과 만나 탁본을 뜨고 자료 조사를 한 결과, 그것이 조선 숙종 46년(1720)경에 설치한 북한산성 정계표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시 언론에 알리고, 또 후에 출판한 졸저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에도 이 사실을 언급하여 관계기관의 관심과 대책을 촉구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올해 여름 북한산 국립공원사무소로부터 연락을 받고 약간의 자문에 응했고 그 결과, 지금은 바위 글씨 옆에 안내판도 설치하고 또 무엇보다 보행자용 데크를 바깥쪽으로 조금 이동시켜서 글씨가 온전히 드러나게 되었다.

아무쪼록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던 ’선성정계‘ 바위 글씨가 세상에 드러나도록 힘써준 북한산 국립공원사무소 박기연 소장과 민웅기 과장에게 감사드리며, 또 최근에 인수봉 아래 묻혀있던 고려 시대 석불을 발굴하는 등, 북한산국립공원 내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의 발굴과 보존에 힘쓰고 있는 북한산 국립공원사무소의 노력에 지지와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새로 설치한 표지판도 볼 겸 이번 제38차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코스는 서오릉, 이말산, 산성정계로 정했다.

 

서오릉과 숙종이 사랑한 고양이 금묘(金猫)

서오릉의 가을은 고즈넉하다. 세상은 한창 코로나19로 시끄러운데도 서오릉만은 그런 세속의 번거로움과 무관하다는 듯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평화가 넘친다. 키 큰 은행나무는 옛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고, 왕릉 입구에 우뚝 선 홍살문, 길게 이어진 참도(參道), 정자각, 그리고 누렇게 변해가는 잔디와 무덤을 지키는 석물들의 조화가 인상 깊다.

서오릉에는 본래 다섯 개의 능과 두 개의 원, 그리고 하나의 묘가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나의 무덤이 더 추가되었어야 마땅하다. 금묘원(金猫園), 또는 금손묘(金孫墓)로 불렸어야 할 이 무덤의 주인공은 바로 숙종이 사랑했던 고양이 금묘(金猫)이다. 비록 왕이나 왕비의 서열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왕자나 후궁의 지위에 견주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재위 기간 46년,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금묘는 숙종이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였는지 모른다.

어느 날 금묘는 수라간에서 임금의 고기를 훔쳐 먹었다는 누명을 쓰고 도성 밖 절간으로 유배되는데 궁중에서 귀한 음식 먹으며 자란 몸이 하루아침에 절간의 거친 음식을 먹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 후 숙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금묘는 식음을 전폐한 채 슬피 우니 이 소식을 들은 혜순대비가 금묘를 가엾게 여겨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금묘는 궁궐의 좋은 음식도 마다한 채 숙종의 시신이 모셔진 빈전 뜰에 머리를 조아리며 몇 날 며칠을 슬피 울다가 끝내 피골이 상접한 채로 숨을 거두었다. 인원왕후[혜순대비]가 죽은 금묘의 몸에 비단옷을 지어 입히고 수레에 실어 명릉 근처에 장사 지내게 하였다.

이 금묘 이야기는 이하곤의 『두타초(頭陀草)』, 김시민의 『동포집(東圃集)』,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 기록되어 전하는데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금묘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숙종이 승하하자 죽음으로써 은혜를 갚은, 보은의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승정원일기』에도 “숙종 대왕께서 고양이를 대하고는 우(禹) 임금이 죄인을 보고 우셨던 어짊을 본받아 금손(金孫)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셨으니 은택이 금수에 미치도록 힘쓴 것이었습니다.”라는 간단한 언급이 있다.

물론 이 금묘 이야기는 사실보다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다. 특히 숙종 조 이후로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강력한 왕권 확립을 위해 의도적으로 충과 의를 강조한 이 같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숙종이 유난히 금묘를 사랑했으며, 금묘 역시 누구보다 숙종을 잘 따랐고 죽은 후에 숙종의 능 근처 어딘가에 묻힌 것만큼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비록 하찮은 미물이지만 조선 최초의 퍼스트 캣으로 알려져 온 금묘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서오릉에 가면 정성왕후 곁에 자리를 마련해 놓고도 끝내 그 곁에 묻히지 못한 영조의 이야기도 있고, 또 정성왕후와 쌍 초상이 나는 바람에 새로운 능을 조성하지 못하고 엉겁결에 명릉에서 더부살이하는 인원왕후의 이야기도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거기에 금묘에 이야기가 더해진다면 서오릉은 더욱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문화유산이 되지 않겠는가?

이번 기회에 금묘의 무덤은 아니더라도 명릉 근처 양지바른 언덕 어디쯤에 조그만 빗돌이라도 하나 세워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그 빗돌 뒷면에는 금묘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노래한 김시민의 「금묘가」를 새기는 게 좋겠다.

 

은언군 이인의 애화 서린 이말산

이말산은 산에 말리화(茉莉花), 곧 재스민이 많아서 생긴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같은 지명이 사용됐던 것일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완산 이 씨 묘역의 이세철 묘비와 조선 영조 연간에 정래교가 쓴 창랑 홍세태의 묘지명 등에 ‘이말산(莉茉山)’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18세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말산의 ‘이말(莉茉)’은 정말로 재스민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한자로 이말(莉茉), 또는 말리(莉茉)가 둘 다 재스민을 뜻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재스민이 외래종으로 조선 시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최근, 조선 숙종 영조 연간에 활동했던 역관 이영수의 묘비에서 ‘이말산(李末山)’이라는 표기가 발견됨에 따라 ‘이말’이 곧 재스민이라는 주장은 더욱 신뢰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이말’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조선 시대에는 성저십리라고 해서 도성으로부터 십 리 이내에는 묘를 쓸 수가 없었다. 이말산은 바로 성저십리의 경계 밖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조선 시대 도성 서쪽의 대표적인 공동묘지로 특히 내시, 궁녀, 역관, 의원 등 중인계층의 묘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혹 성저십리 마을에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이말산’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은 아닐까?

영천이씨 묘역을 지나면서부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물들이 눈에 띈다. 어차피 유한한 인생, 삶의 끝자락은 곧 죽음이라고 해도 여기저기 파헤쳐진 봉분들과 주인 잃은 석물들을 대하노라니 왠지 마음이 편치가 않다. 살아서의 삶은 비록 고단하였을지라도 죽어서나마 편히 쉬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한결같은 바람일진대 오늘의 이말산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고혼들의 비명이 가득하다.

이말산에는 은언군 이인(李)의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 은언군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배다른 동생이다. 1754년에 태어나 10세 때 은언군에 봉해졌으나 사도세자가 죽은 후 할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사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정조 10년인 1786년에는 장남 상계군의 역모죄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강화도에서의 유배 생활 중에도 정순왕후 등 반대 세력으로부터 역모의 근원으로 지목되어 끊임없이 생명을 위협받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그나마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자 결국 1년도 안 돼 부인과 며느리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구실로 강화도 배소에서 사약을 받고 향년 48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이 은언군의 묘가 이말산에 있었는데 그의 손자가 조선 제25대 왕 철종으로 등극하였기 때문에 왕의 친할아버지로서 그의 묘에는 제각이 설치되고 여러 가지 석물들과 신도비가 세워졌다. 신도비의 비문은 1851년에 철종이 직접 짓고 조인영이 글씨를 썼으며 이후 철종은 정기적으로 할아버지 은언군의 제각을 찾아 참배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지명이 제각말, 또는 잿말이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의 제각은 6·25 때 불타 없어졌고, 육칠십 년 대 개발 광풍을 타고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무덤을 지키던 석물들이며 묘비와 신도비 또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의 신도비는 현재 모 사찰 창건주의 송덕비로 둔갑해 있고, 장군석과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은 창건주의 무덤을 지키고 있으며, 묘비는 그가 사약을 받은 것이 천주교와 연관이 있다고 해서 현재 절두산 성지에 옮겨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은언군의 묘는 효종과 현종 숙종 등 40여 년간 4명의 임금을 모셨던 상궁 옥구 임 씨 묘비 근처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임 상궁 묘비 근처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진실을 알고 있겠거니 하고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상선 노윤천의 묘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본래 이말산의 남동쪽 기슭에는 여러 성씨의 가족 묘역과 내시, 궁녀, 역관, 의원, 여항 시인 등의 수많은 무덤이 산재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조선 숙종 영조 연간에 활약했던 위항시인 창랑 홍세태의 묘가 이곳 이말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불우한 천재 시인 이말산에 잠들다

창랑 홍세태는 평생을 불우하게 살다 간 천재 시인이었다. 대대로 역관 무인 등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이씨 집안의 노비였으므로 그 역시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5살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시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까닭에 그의 이런 재능을 알아본 청성군 김석주와 동평군 이항이 은자 200냥을 내어 그를 속량 시켰다는 일화가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실려 있다.

성품이 강개하여 자신을 무시하거나 오만하게 구는 자에게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았으며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김창흡, 이규명 등과 신분을 초월한 망형지교를 맺었다. 23세 때 식년시 잡과에 응시하여 한역관(漢譯官)으로 선발되었고, 1682년 통신사 부사 이언강의 자제 군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 사행 길에는 시와 그림으로 실력을 마음껏 뽐내기도 했다.

그러나 미천한 신분과 강개한 성품은 평생의 족쇄가 되어 그의 앞길을 막고 가난에 허덕이게 했다. 물론 같은 중인 출신으로 내수사에 들어가 부를 축적했던 임준원의 도움도 받았고, 또 김석주, 김창협, 김창흡, 홍상한, 최석정 등 당시의 명문 세도가들로부터도 일정 부분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가난했고 늘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가난한 데다 자식 복마저 없었던 홍세태는 끝내 아들을 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출가한 두 딸도 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같은 불행도 그의 시작(詩作)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의 시는 어려운 글자나 전고(典故)를 사용하지 않고 화려한 수사와 미사여구를 구사하지 않았지만, 일상 속에서 겪는 삶의 애환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문집을 출간하기 위해 돈을 저축해두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이덕무는 “어찌하여 살아있을 적에 은전 70냥으로 돼지고기와 좋은 술 등을 사서 70일 동안 즐기면서 평생 주린 창자나 채우지 않았는가?” 하고 그 어리석음을 꾸짖었다고 하나, 이덕무 자신 『맹자』를 팔아서 식구들의 양식을 마련했던 아픔이 있는 사람인지라 어찌 그것이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겠는가?

홍세태의 문집 『유하집』은 그의 사망 6년 후에 사위 조창회와 문객 김정우에 의해 14권으로 간행되었다. 이 문집에는 부(賦) 3수, 시(詩) 1,627수, 문(文) 42수 등 모두 1,670여 수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생전에 직접 쓴 서문에는 식암 김석주와 농암 김창협같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제대로 평가해줄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서문을 짓는다고 하였으니 그의 문학적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유하집』 말미에 첨부된 정래교의 묘지명에 따르면, 홍세태는 1725년 을사년 정월 보름,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양주 이말산 신혈리 남동쪽 언덕에 장사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부인 이 씨 역시 3년 후에 사망하여 남편 옆에 묻혔다. 후에 영조 때의 문신 조현명은 창랑 홍세태에 대해, “간이 최립과 더불어 조선의 빼어난 위항시인으로 한유, 유종원과 자웅을 겨룰만하다.”라는 평을 남겼으며, 그의 묘가 아무런 표지도 없이 필부들의 무덤에 뒤섞여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여러 사대부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시인 창랑 홍세태의 묘’라고 새긴 묘표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창랑 홍세태의 묘는 흔적도 없고 묘표 또한 간 곳을 알 수 없다. 평생 자신을 괴롭힌 신분적 한계와 가난의 굴레를 오로지 뛰어난 문학적 성취 하나로 헤쳐 나갔던 창랑 홍세태, 그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묵묵히 참고 기다렸다. 흡사 소금 수레를 끌며 태항산을 오르는 천리마처럼 언젠가 백락을 만나 우렁찬 울음을 터트릴 그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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