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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에서 까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은 단연코 실상사다. 실상사 자체만으로도 볼거리가 많지만 ‘7암자 코스’라 하여 약수암~삼불사~문수암~상무주암~영원사~도솔암을 지나 주능선까지 가 닿는 산행도 (샛길로 묶였지만) 사랑을 받고 있다. 산내면엔 두 개의 암자가 더 있는데 이 달엔 그 길을 소개하려 한다.

글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산내면 대정리 중기마을 가장 끝 ‘지리산 길섶’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길섶은 사진작가 강병규 씨의 갤러리, 지리산구절초영농조합법인, 또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체험형 숙박업소이자 숲속카페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분들과 지역민들에게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을 꿈꾸며 지난 2009년 문을 열었다. 길섶은 구절초축제로도 유명하다. 2천 평에서 시작한 꽃밭은 조금씩 땅을 넓혀 3년 만에 8천 평이 되었다. “축제를 통해 마을 기업을 활성화하고 지리산둘레길 탐방객들에게 의미 있는 문화 콘텐츠를 제공하고 싶어요. 지역 관광사업과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경제 활성화 및 노인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고 싶고요.”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축제가 취소됐다. 축제 여부와 상관없이 꽃은 어여쁜 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길섶’에서 서진암까지

서진암~백장암 트레킹은 강병규씨와 함께 하기로 한다. 맛깔난 아침식사에 갓 내린 핸드드립 커피까지 마시고 길을 나선다. 길섶 뒷산은 지리산둘레길(인월~금계)과 맞닿아 있다. 갈림길엔 양팔을 벌리고 선 나무 이정표가 있다. 길섶 방향에서 보자면 이정표의 뒤통수인 셈이다. 이정표 앞으로 돌아오면 이번엔 길섶을 알리는 작은 현수막이 보인다. 둘레꾼들은 갈림길 이정표 뒤로 이어진 길 끝에 구절초 천국인 길섶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지리산둘레길 3구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편한 길이 이 일대다. 갈림길에서 왼쪽은 구간 초입인 인월 방향이고, 오른쪽은 금계가 된다. 서진암으로 가려면 왼쪽으로 가야 한다. 매번 순방향으로 걷다 반대로 가려니 모든 길이 낯설고 새롭다. 가을을 준비 중인 숲이지만 길 위는 여전히 초록으로 반짝였다. 얼추 봐도 10미터는 넘을 듯한 꺽다리 소나무는 곧고 편한 길 좌우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길이다. 한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서어나무 한 그루는 이제 늙고 병들었다. 아니 어쩌면 진즉에 삶을 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보듬어 봐도 온기가 없다.

오르막을 올라서면 장항마을에서 오는 너른 길과 만난다. 여기에 서진암 갈림길(600m)이 있다. 인월을 출발한 둘레꾼이라면 우리가 걸어온 방향, 그러니까 오른쪽으로 가야 맞다. 서진암 이름이 적힌 돌 아래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물병에 챙겨온 오렌지주스가 벌컥벌컥,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서진암 쪽으로 방향을 꺾자 이번에는 ‘직로’와 ‘우회로’로 길이 나뉜다. 두 곳 다 가본 강병규 씨가 우회로를 선택한다.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서진암으로 가는 길은 어둡고 차분하다. 아침 내내 맑았던 하늘은 어느새 구름으로 덮였고, 안 그래도 인적이 드문 길엔 적막만이 가득하다. 조용히 걷기에만 열중 중인데 앞서 걷던 병규씨가 “뱀!” 소리를 높인다. 몇 해 전 백무동에서 칠선계곡 비선담까지 간 적이 있는데, 그땐 9km를 걷는 동안 네 마리의 뱀을 봤었다. 그 후론 긴 바지에 중등산화를 신어야만 안심이 된다. 오르막이 끝나면서 왼쪽으로 무던한 길이 이어진다. 길 막바지에 다른 길이 있는 걸 보니 아마 ‘직로’로 곧장 올라선 길인가 보다. 직로와 우회로가 만나는 곳에서 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조용한 숲에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도 안면이 익는 게 전날 길섶에 묵었던 손님들이다. “이렇게 먼 줄 몰랐어요. 그래도 정말 좋네요!” 산책이나 하겠다고 나갔는데 서진암까지 오게 된 모양이다. 일행 중 한 명은 맨발이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좀 전에 본 뱀이 생각났다. 신발 신으라고 할 걸….

 

서진암에서 백장암까지

세암 또는 세진암이라 불렸던 서진암은 실상사의 산중 암자다. 소장 중인 다섯 구의 나한상 중 한 구에 ‘정덕 십일년 병자 화주 경희’라고 새겨진 것으로 보아 적어도 1516년(중종 11)엔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순조 22년(1822) 불에 타 없어진 걸 5년 뒤 두타·대영스님이 중건했다. 1917년 운담기순 스님이 다시 중건했고, 1933년 불에 탄 뒤 재차 지어진 암자다.

개 ‘발심’이가 먼저 손님을 맞는다. 낯선 객을 향해 짖어대는 통에 염불을 외던 스님이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내민다. “물은 저 안에 있습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몰골이 딱 물을 구걸하는 모양새로 보였나보다. 음료로 채워졌던 물통에 ‘반야샘’이라고 적힌 석간수를 담는다. 구름이 잔뜩 껴 처마 너머의 지리산 능선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아쉽지만도 않은 게 왠지 다음에 또 와도 좋을 법한 풍경이다. 강병규 씨는 법당을 향해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한다.

백장암으로 가는 길은 서진암 입구에 있다. 돌계단 끝에서 서진암은 우측, 백장암은 좌측이다. 이제부터는 강씨도 초행이다. 다행히 길은 좋았지만 갈림길에선 어김없이 갈등을 한다. 기왓장 하나가 이정표 역할을 한다. 서진암에서 온 길, 서룡산(1,073m)으로 가는 길, 백장암으로 가는 길이 기왓장 앞에서 나뉜다. 가파른 우측으로 내려서지만 오간 이가 많지 않았는지 수풀이 우거졌다. 이끼 낀 돌탑과 계곡을 건너면 다시 한 번 길이 나뉜다. 직진과 왼쪽 내리막, 결국 확신을 할 수 없어 등산어플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이정표도 선답자의 안내리본도 보이지 않을 땐 관련 앱만큼 유용한 것도 없다. 왼쪽으로 가야 맞다.

풀숲이 한 번 더 나오지만 이후로는 길이 넓고 곧다. “소나무가 백장암스럽게 생겼는데요?” 강병규 씨의 직감대로 백장암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백장암도 실상사의 속암이다. 백장선원은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문파를 이뤄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곳이란다. 백장암엔 국보 제10호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 석등, 보물 제420호인 청동은입사향로 등의 문화재가 있다. 25년 전쯤 초판을 펴낸 <답사여행의 길잡이> 속 흑백사진엔 대웅전 대신 돌담장 안의 석탑과 석등, 부도만 있다. 대웅전은 근래에 생겼다.

백장암에 닿고서야 하늘이 개기 시작한다. 드문드문 보이는 파란색이 깔끔한 대웅전과 오랜 석탑 위에서 빛을 발한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들마루가 놓였다. 스님이 지나는 객을 불러 차를 권한다. 호의까지도 망설여지는 바이러스의 시대지만 마루 한쪽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정성껏 우려낸 차를 대접 받는다. 백장암 석간수로 끓인 찻물은 좋은 차의 맛을 몇 곱절 더 맛나게 한다.

 

람천에 이런 곳이!

백장암 아래 60번 지방도는 전북과 경남을 잇는 지리산 여행의 관문 같은 곳이다. 이 도로 아래 람천이 있고, 람천 너머엔 지리산둘레길이 있다.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들은 옆을 볼 겨를이 없고, 둘레꾼들은 숲 너머 개천에 이런 바위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강병규 씨를 따라 람천으로 내려선다. 풍경은 기대 이상이었다. 마치 섬진강 상류의 장군목, 가깝게는 함양 용유담 같다. 람천의 물줄기는 바닥의 돌들을 기묘한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곳곳에 생긴 포트홀 안엔 어김없이 작은 돌들이 들었다. 이 돌은 물살이 몰아칠 때마다 믹서처럼 돌아가며 더 큰 동그라미, 제2 제3의 요강바위를 만든다.

바위와 물뿐일 것 같은 개천엔 초록의 숲과 작은 폭포도 있다. 이 물은 장항마을 아래 수성대에서 흘러드는 지류다. 하류로 갈수록 물은 수량을 불리며 풍경을 더 돋보이게 했다. 저만치 요상한 흔적 하나가 보인다. 공룡의 발톱 자국 같기도 한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뫼 산(山) 자를 꼭 닮았다. 지리산 물줄기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바위 곳곳엔 보는 각도와 시선에 따라 제각각의 모양을 한 바위들이 수두룩하다. 물결은 세월의 흔적대로 바위에 수많은 모양을 남겼다. 그런데도 여타의 개울에 비해 관심 밖으로 밀려나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다.

람천 트레킹은 수량이 많지 않은 봄가을 걷기여행 코스로 딱이다. 상류에서 시작해 하류로 걷는 게 더 재밌다. 다만 공식 코스가 아니라 마땅한 출입구가 없단 건 흠. 백장암 입구 쯤에서 내려와 실상사까지 가도 좋고, 길가에 건물이 보인다면 그쪽으로 올라도 된다. 간간이 나오는 숲과 계곡은 걷는 재미를 더한다. 물이 빚어낸 조각상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에 정식으로 다시 와야겠는 걸요.” 흐린 날의 서진암도 그렇고, 백장암에서 이어진 서룡산~삼봉산~등구재 산행도 그렇고, 알고 보면 이리저리 갈 데가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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