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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서회와 함께하는 인문산행_관악산

 

관악산 북쪽 계곡에

신선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네


글 · 이종헌(인문기행 작가)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벌써 몇 주 째 계속된 장마로 온 나라가 물바다다. 급류에 휩쓸린 집과 자동차가 속절없이 둥둥 떠내려가는가 하면, 갑자기 불어난 물을 피해 지붕 위로 올라간 소들이 아슬아슬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수마가 할퀴고 간 크고 작은 상처들을 보며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절감한다.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오만함이 빚은 참극이라고 입을 모은다. 도무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코로나도 그렇고 갈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지구온난화도 그렇고, 모두가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재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장마가 그치고 수해복구가 어느 정도 끝나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하고 환경을 파괴할 게 뻔하다. 그러니 탐욕이란 어쩌면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최후의 형벌이 아닌지 모르겠다. 흡사 하데스의 언덕에서 끊임없이 무거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인간도 영원히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삶은 결국 비극인 것인가?

 

지금의 서울대 관악캠퍼스 자리에는 누가 살고 있었나?

수마로 모든 것을 잃은 이재민께는 죄송스러운 말이나 지난 몇 주 동안 이어진 비로 인해 관악산 계곡이 깨끗해졌다. 물속 바위들은 제 몸을 휘감은 거무튀튀한 이끼들을 깨끗이 떨쳐버린 채 본래의 생기를 되찾았고, 수질도 좋아져 바닥의 모래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물줄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방의 바위에 부딪혀 영롱한 물보라를 만들어내고, 모처럼의 장쾌한 풍경에 새들도 신이 났는지 날갯짓이 힘차다.

지금의 서울대학교가 자리 잡은 관악산 계곡 일대를 예전에는 자하동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 초,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에는 의성 김씨 집성촌인 자하동 마을이 있었고, 5백 년 이상 마을을 지켜온 미륵불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조 최고의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추앙받는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유적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최석정(1646~1715)이 쓴 「이로당기」에 의하면, 이곳 자하동 마을에 성천부사 신여석, 공조판서 신여철 형제가 세운 이로당(二老堂)이 있었다. 크기는 서너 칸 규모이고, 건립 시기는 숙종 연간인 1675년에서 1680년 사이이다. 이후 신여석의 차남 신확(申)이 이로당 옆에 만오당을 짓고, 자하계라고 불리는 개울가에 작은 모정(茅亭)을 지었으며, 최석정은 신확의 대자 글씨 ‘제일강산(第一江山)’을 자하계의 바위에 새겼다. 이로당은 숙종 15년(1689)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그때 심은 세 그루의 느티나무는 무려 300여 년 동안 당산목으로서 수호신 역할을 하며 자하동 마을을 지켜왔다.

자하 신위는 그의 5대조 할아버지가 터를 잡은 이곳 자하동 별장에서 어린 시절, 독서와 산수 유람을 즐겼고, 또 그의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윤상도의 옥사(獄事)’ 때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 자하동에 몸을 의탁했다.

하지만 지금, 자하동 마을은 물론이고 자하 신위의 흔적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머물렀던 자하산장(紫霞山莊)과 이로당(二老堂)의 옛터, ‘제일계산(第一溪山)’ 바위 글씨, 그리고 형과 아내와 자식들을 묻었던 선영 등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다. 이로당의 옛터에 남아있던 수령 3백 년 이상의 느티나무도 지난 1978년 수명을 다한 채 고사했다. 그리고 이로당 아래로 흐르던 자하계(紫霞溪)는 서울대의 지하 세계 속으로 모습을 감춘 지 오래다.

 

자하동의 상징 - 느티나무와 미륵불

관악산 아래 60여 가구의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자하동 마을이 사라진 것은 1970년대 초 이곳에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들어서면서이다. 해체될 당시 마을은 전체 60여 가구 중 50여 가구가 의성 김씨였을 만큼 의성 김씨들이 대대로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언제부터 의성 김씨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의 역사는 최소 300년에서 7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1967년 이곳에 관악컨트리클럽이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꿋꿋하게 버텨냈던 이 마을 주민들은 1970년 2월 관악산 일대가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부지로 최종 결정되면서 결국 지금의 약수사 근처와 고시촌 일대에 조성된 철거민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다.

1978년 10월 9일 자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는 캠퍼스 진입로에 있던 3백 살이 넘은 느티나무가 수명을 다해 베어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후에 미대 조소과 실습용으로 쓰였다는 이 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약 340년 전, 이곳 자하동에 이로당(二老堂)이 들어설 때 심은 세 그루의 느티나무 중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었다.

자하동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은 자하동 주민들의 이주단지 중 하나인 신림동 고시촌에서 새마을금고를 운영하는 김운기 이사장의 증언에 의하면 이 느티나무들은 1973년 마을이 철거되기 전까지도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마을이 철거되고 나자 나무들 스스로 그 수명을 다했다고 한다.

자하동 마을 느티나무는 1970년에 제작한 영화 「꼬마 신랑」에 온전히 그 모습이 담겨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꼬마 신랑」은 현재 그 영상을 구할 수가 없다. 또 이보다 먼저인 1964년에 제작된 영화 「사자성(獅子城)」 역시 이곳 자하동에서 촬영했다고 하는데 혹시 옛 마을과 느티나무의 모습이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

느티나무와 더불어 자하동 마을을 지켜온 또 하나의 수호신은 미륵불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이 석불의 공식 명칭은 「국수봉 석조 미륵 좌상」으로 그 제작연대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이 해체되면서 이 미륵불 역시 수난을 면치 못했다. 김 이사장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 국수봉 도당에 모셔져 있던 미륵불은 도당이 없어지면서 산에 방치되었고, 미신타파 구호가 한창이던 시절 관악산을 찾은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핍박 아닌 핍박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마을이 해체되면서 부득이 인근 성불암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본래 자하동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 주민들에게는 영험한 부처님으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마을 주민이 아닌 타지 사람들에게는 더는 영험한 존재가 못 되었던 모양이다. 성불암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던 미륵불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서울대박물관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본래의 영험함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옛 터전인 자하동을 굳게 지키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다.

비록 자하동을 떠나서 살고 있지만, 미륵불은 지금도 옛날 자하동 사람들에게 강력한 숭배의 대상이다. 쇠그릇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강한 염력을 지녔으며 특히나 제 몸에 손을 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재앙을 내렸다고 하니 그 자신 끝까지 자하동을 지키며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빌고자 하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조선조 최고의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 - 자하 신위의 삶과 예술

자하 신위(申緯)는 1769년(영조 45) 한양 장흥방(長興坊)에서 아버지 신대승과 어머니 함평 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관악산 북쪽 자하동에 이로당을 짓고 터전을 마련한 성천부사 신여석의 6세손으로 어려서부터 자하동에서 독서하고 학문을 연마한 까닭에 스스로 호를 ‘자하’라고 했다. 서영보, 신대우, 이만수 등과 강화학파의 거두인 이광려(李匡呂)에게 수학하였으며, 정약용, 정학연 부자, 초의선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당파를 초월하여 노론 계의 김조순, 김정희 등과도 교류했다.

16세 때인 1784년(정조 8), 예조 좌랑 조윤형의 딸과 혼인하고, 31세가 되어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812년 7월 주청사(奏請使)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가, 당시 청나라 문화계의 거두인 옹방강을 만나 교유하였다. 곡산부사, 춘천부사, 강화유수 등을 역임했으나 그 재주에 비해 관로는 순탄치 못했다.

자하는 당시 선비 사회 최고 찬사인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평생 4,500편의 시를 남길 정도로 시에 출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3대 묵죽(墨竹) 화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18세기 화단을 이끌었던 강세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글씨는 왕희지를 근간으로 하여 미불과 동기창을 배운 후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

자하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윤상도 옥사’는 그와 추사와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몇 해 전, 과천에 있는 추사박물관에서 ‘자하 신위 특별전’이 열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뜨끔했던 적이 있었다.

‘윤상도(尹尙度) 옥사’란 1830년 부사과 윤상도가 호조판서 박종훈, 강화유수 신위, 어영대장 유상량을 탐관오리로 몰아 탄핵한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인물이 하필 추사와 그의 아버지 김노경이었다. 김노경은 이 일로 1830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으나, 1840년에 김홍근(金弘根)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를 재론하여 관작이 추탈되었다. 추사 역시 이로 인해 1840년(헌종6)에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848년에 풀려났다. 물론 이 사건은 개인 간의 사사로운 문제라기보다는,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벌어진 일로 아직 그 시시비비가 온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이 ‘윤상도 옥사’로 인하여 자하 신위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 시기 자하동에 은거하며 쓴 《구십구암음고》에 당시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로도 자하는 강화 유수 재직 시 직무를 소홀히 했다는 경기어사 이시원의 논박을 받고 평산(平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여러 가지 고초를 겪는다. 젊은 시절 자하와 추사가 교유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적어도 ‘윤상도 옥사’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운 단계로 접어든 게 분명하다. 추사는 이 사건으로 10여 년의 유배 생활을 했고, 자하는 평생 탐관오리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자하 신위는 그의 높은 예술적 성취 못지않게, 적서차별이라는 당대의 인습에 반기를 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하는 측실 조(趙) 씨에게서 4남 1녀를 두었는데, 당시의 세태와 달리 아들들을 모두 족보에 올리고 양자를 들이지 않았다. 사실, 자하 당시만 해도 정실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을 경우 비록 측실에게서 얻은 자식이 있다 할지라도 가문의 보존을 위해서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얼들은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고 관직에 오른다 해도 대부분 무관으로 미관말직을 전전하는 것이 현실이었으므로 서얼에게 가문을 맡기는 것은 곧 가문의 몰락을 방치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자하는 이런 당시의 현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나는 다만 내 자식만을 알뿐, 가문 따위는 알지 못한다.”라고 하여 측실 조(趙) 씨에게서 난 아들 명준을 적자로 삼아 제사를 이어받게 하였으며 또 아들과 사위의 이름을 모두 족보에 올렸다. 이 당시 대부분 서얼이 족보에도 오르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자하의 이런 행동은 가히 파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순조 20년(1820), 춘천 부사 직에서 물러난 후 쓴 시를 묶은 『벽로방별고(碧蘆舫別藁)』 「잡서(雜書)」 50수에는 서얼 차별에 대한 그의 불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有才不用豈天意  재주 있는 자 쓰이지 못함이 어찌 하늘의 뜻이랴?

爀家門禁錮民  혁혁한 가문들이 백성의 앞길 가로막고 있네

四海九州千萬古  사해(四海) 구주(九州) 천만년 이래로

再無徐選這般人  서선(徐選), 저 같은 사람 다시는 없으리라

 

서선은 조선 태종 때의 문신으로 서얼금고법(庶禁錮法)을 제정하게 만든 인물이다. 늘그막에 벼슬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두 아내와 자식들 거느리고 오순도순 살고 싶었던 자하였지만, 불행하게도 두 아내는 물론 장남 명준, 삼남 명우, 사남 명두와 차녀 등 가족 대부분이 그보다 먼저 죽었다. 자하는 결국 차남 명연의 시봉을 받다가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그 장소는 장흥방 본가가 아닌 명연이 현감으로 있던 충청도 결성현(結城縣)이었다. 창강 김택영이 연보를 작성하면서 자하가 77세 때인 헌종 11년(1845) 한양의 장흥방에서 죽었으며, 자하동 선영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한 것이 한때 혼선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하는 79세 때인 헌종 13년(1847) 차남 명연이 현감으로 있던 충청도 결성현에서 사망하였으며 그 묘가 결성 수룡동 임좌(壬坐)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사실 자하의 죽음에 관해서는 의문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살아생전에 4,500여 편의 시를 남긴 대시인이지만 그 흔한 행장이나 묘표 하나 없으니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끝내 양자를 세우지 않고 서자 명준과 명연을 후사로 삼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늘그막에 심취했던 불교 사상의 영향 때문인지, 그도 저도 아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가 정실 소생이건, 측실 소생이건 간에 그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자신의 안위와 가문의 명예에 연연하기보다는 사회적 편견과 제도의 잘못에 맞서 자녀들을 지키고 보호하려 했다는 것이다.

자하는 흡사 일기를 쓰듯 시를 썼다. 삶이 곧 시였고 시가 곧 삶이었다. 그는 살아서 이미 자신의 시집을 완성하였고 4,500여 수의 시 속에 자신의 인생역정과 예술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남아있는 시를 통해 그의 삶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으니 어쩌면 처음부터 행장이니 묘표니 하는 것들은 필요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자하의 시는 어렵다. 최근 몇 권의 번역서가 나오기는 했으나 그 깊고 그윽한 시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우리의 지식이 너무 얕다. 흡사 작은 간장 종지로 바닷물을 재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문득 관악산 북쪽에 자하 기념관이라도 하나 들어서서 자하의 삶과 예술 세계가 제대로 조명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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