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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서회와 함께하는 인문산행_북한산 편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북한산성 이야기

글 · 이종헌(인문기행 작가)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북한산은 한해 방문객이 6백만 명을 넘을 정도로 이용객이 많다. 한때는 1천만 명에 육박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숫자가 많이 준 것이 이 정도라고 한다. 북한산이 제아무리 강철처럼 단단한 산이라고 해도 그처럼 많은 사람의 발길에 차이고 짓밟히며 견뎌온 날들을 생각하면 아마도 속으로는 벌써 골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산은 인(仁)의 상징이다. 만물을 품에 안고 긍휼히 여기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버이와 같다. 그 어버이가 병들어 끙끙 앓으면서도 찾아오는 자식들 마다하지 않고 반갑게 맞아주는 모습을 보면 고마운 마음보다도 미안한 마음이 먼저 앞선다. 석양에 길을 잃고 우는 어린아이 신세가 되기 전에 이제는 정말 살아계신 부모에게 하듯 산에게도 효도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죽고 나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인가?

효도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많은 용돈을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더 들어주기 원하는 우리네 부모처럼 산 또한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산의 지난한 역사를 알게 되고, 그 역사를 알게 되면 더욱더 산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산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행히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소장 박기연)에서도 이 같은 산의 이야기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활동이 주로 공원 내의 자연 보호와 환경 보전 위주였다면 이제부터는 북한산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데도 힘을 쏟겠다고 하니 진심, 반갑고 고맙고 기쁜 일이다.

 

일곱 남자의 유쾌한 수다

한국산서회의 6월 인문산행을 위하여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 민웅기 자원보전과장, 박민경 계장과 함께 일곱 남자가 다시 만났다. 7월부터는 인문산행이 정상적으로 진행한다고 하니 답사 형태의 인문산행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한국등산사연구회 박기성 회장은 오랫동안 북한산성의 축성방식을 연구해온 인물이다. 그로부터 북한산성 축성과 관련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배성우 이사는 일찍이 원효, 염초, 만경대 암릉을 오르내리며 고려 시대 중흥산성의 유적을 답사한 바 있다.

조장빈, 허재을 이사는 바위 글씨와 마애불 전문가로서 상운사 마애불과 훈련도감 유영지의 바위 글씨를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이다. 북한산 등산 경력 30년의 김장욱 시인은 원증국사 탑이 있는 태고사와 함께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산성 최고의 비경을 소개할 예정이다. 류백현 팀장은 오며 가며 등산로에서 마주친 북한산의 동식물 이야기를, 현해당은 북한산성 북문 방화사건을 재미있게 엮어 들려줄 것이다.

 

북한산성 축성의 비밀

기록상으로 북한산성은 1711년 숙종 37년 4월 3일 공사에 돌입해서 9월 9일에 체성과 여장 공사를 완료했다. 산성 둘레가 11.6km이고, 성벽축조구간은 약 8.6km에 이르는데 평지도 아니고 500m 이상의 능선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연인원 10만 명이 동원됐다고 해도 불과 6개월 6일 만에 공사를 완료했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 비밀을 풀기 위해 박기성 회장은 우리를 북문으로부터 염초봉 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벽으로 안내했다. 외벽과 내벽을 모두 갖춘 협축 양식의 이 성벽은 특이하게도 내벽 축성에 퇴물림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 퇴물림 방식이야말로 북한산성 축성의 비밀을 풀어 줄 중요한 열쇠라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것은 보수 작업을 거친 후여서 사료로서의 가치는 떨어지지만, 원형대로의 복원을 전제했을 때 분명히 이 같은 퇴물림 방식은 조선 시대가 아닌 고려 시대의 성벽 축조 양식이라고 주장한다. 사용된 성돌이 조선 시대 성벽 축조에 사용된 무사석(武砂石)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됐다. 이 성돌은 지난 2014년 부왕동 암문 근처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 성벽의 성돌과 크기와 형태가 유사하다.

결국, 박 회장 주장의 골자는, 조선 숙종 37년에 쌓은 북한산성은 새로 신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고려의 중흥산성을 고쳐 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이를 뒷받침할 자료로 조선 선조 29년(1596) 3월에 병조판서 이덕형이 올린 「중흥산성형세계(中興洞山城形勢啓)」와, 숙종 36년(1710) 10월에 훈련대장 이기하가 올린 「홍복북한양성기지간심서계(洪福北漢兩城基址看審書啓)」를 들었다. 그중 이덕형의 「중흥산성형세계」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신이 1일에 나아가 중흥동(中興洞)에 못 미쳐 촌막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동구(洞口)에 이르러 서북쪽의 외성(外城)을 살펴보았습니다. 삼각봉(三角峰)이 높이 솟아 있고 그 곁에 두 봉우리가 차례로 나열해 섰으며, 성자(城子)는 끝 봉우리의 허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시내의 어구 언덕에 이르러서 끝났습니다. 남쪽 외성은 시내의 암벽에서부터 시작되어 위로 서남쪽 최고봉에 이르러서 끝났습니다. 성(城)에 석문(石門)의 옛터가 있는데 이는 이른바 서문(西門)으로서 중간에 한 가닥의 길이 있어 곧바로 중흥사(中興寺)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중략) 성첩이 무너진 것은 10분의 7∼8이 되는데, 수축한다 해도 높은 봉우리의 정상은 인력의 소비가 커서 쉽게 해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16일」 乙丑 8번째 기사 인용

 

이기하의 서계 역시 이덕형의 서계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하기 전에 그 자리에 이미 고려의 중흥산성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70~80%가 무너진 상태이기는 해도 옛 성의 터전과 남은 성돌들이 있었기에 공기(工期) 6개월 6일의 초스피드 공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북한산성 북문 방화사건

박기성 회장의 설명을 들은 후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오니 곧 북한산성 북문(北門)이다. 대동문, 대성문, 대남문, 대서문, 북문, 중성문 등 현재 북한산성의 6대문 중 유일하게 문루가 없는 이 문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 이번에는 현해당이 나설 차례다. 『비변사등록』 영조 40년(1764) 11월 12일, 총융청의 계(啓)를 바탕으로 당시 사건을 재구성해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조선 영조 40년(1764) 11월 11일 밤 북한산성 북문에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성문과 2층 누각이 몽땅 불타버렸으니 당시 북한산성 관리 업무를 맡고 있던 총융청은 다음날 이를 즉시 영조에게 보고했다. 때는 조선 영조 40년(1764) 11월 12일 아침이다,

 

총융사 구선복(具善復)이 부리나케 입궐하여 어전에 숙배했다.

“전하께 아뢰오. 북한산성 관성장(管城將)이 보고하기를 어젯밤에 북문에 불이 나서 성문과 누각이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란 영조가 정색하고 물었다.

“불이 저절로 났을 리는 없고 혹, 누가 방화를 한 것이오?”

“방화 죄인 한도형(韓道亨)을 잡아다가 신원을 조사해 보니 일찍이 훈국(訓局)의 포수(砲手)였는데 미친 병이 있어 군안(軍案)에서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뭣이라? 지난 경진년(1760) 동가(動駕) 때만 해도 군기가 엄격하여 선왕께서 이룩하신 금성탕지의 면모가 엄연하였거늘 갑자기 이런 해괴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관성장은 누구며 도대체 수하 장교며 군졸들은 무엇을 했더란 말이오?”

총융사 구선복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황공하옵나이다, 전하! 모든 것이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관성장은 전 경기 수사 조제태(趙濟泰)이온데 북한성의 북문은 깊숙이 무인지경에 있어 이전부터 굳게 잠그고 평상시에 여닫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출입이 없다고 경계를 게을리하다니 이는 병가(兵家)에서 가장 꺼리는 바가 아니오?”

진노한 영조는 손바닥으로 연신 어탁(御卓)을 내리치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방화사건 이후 북문의 문루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영조가 1760년, 북한산성에 거동한 후, 대성문(大城門)을 영구폐쇄하고 문수문을 대남문으로 승격하면서 엉뚱하게도 북문 복구에 쓰일 자재들이 대남문 문루 건설 공사에 쓰이고 만 것이다.

 

훈련도감 유영지와 바위 글씨

북문에서 훈련도감유영지로 이동하는 도중에 류백현 팀장의 생태교실이 진행되었다. ‘나무는 나무요, 풀은 풀이로다.’라는 우리의 식물관과 달리 그는 작은 풀 하나, 열매 하나에도 관심을 두고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한창 창궐하는 매미나방 애벌레 이야기며 한 나무에 두 개의 이름이 붙은 백합나무 이야기를 듣는 사이 어느덧, 훈련도감유영지의 거대한 석축과 장방형의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 훈련도감유영에는 중심건물인 대청을 비롯하여 내아(內衙), 군량 창고, 무기고, 죄인을 가두는 구류간(拘留間)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무너지고 터만 남았다. 전체 건물 규모는 총 130칸으로 무기고에는 조총, 중총, 수철대포(水鐵大砲), 목모포, 철자포(鐵字砲), 유불랑기(鍮佛狼機) 등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감관 1인, 창고지기 2인, 북문지기 2인, 수구문지기 1인 등 10여 명의 장교와 이졸(吏卒)을 두었다. 바위 글씨로는 ‘戊(무)’, ‘戊法臺(무법대)’, ‘天符倧檀紫戊院(천부종단자무원), 戊鼎金龜淵(무정김구연)’ ‘后天符(후천부)’, ‘초승달, 將(장), 별’, ‘별자리8괘’ 등이 있으나 이는 훈련도감유영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김덕묵 한국민속기록보존소 소장이 쓴 <북한산과 무속신앙>에 따르면, 이곳 훈련도감유영지는 무법대(戊法臺)라고 하는 기도 터로 1905년 김구연(金龜淵)이 세운 일종의 제천단(祭天壇)이며, 무법대 부근에서는 매년 초 등산객들이 한 해 동안 산에서 아무런 사고가 없이 해달라고 시산제(始山祭)를 지냈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이곳은 무속인들의 영험한 기도 터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지면 관계상 김장욱 시인의 태고사와 북한산성 제일 승경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하반기에 <성능 스님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김 시인이 인문산행을 추진하기로 하였으니 아쉽지만, 그때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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