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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_ 전남 구례군 산동면 현천마을

 

하늘에서 쏟아진 축복,

샛노란 산수유 꽃

 

본래 남원 땅이었다가 1897년 구례군에 편입된 산동면은 처음엔 지리산 안쪽의 내산면과 바깥쪽의 외산면으로 나뉘었었다. 현재 방영중인 MBN-TV 예능프로그램 <자연스럽게>의 배경인 현천마을은 지리산과 가까운 내산면에 속했다. 이후 1932년 두 면을 합했는데, 지리산 골짜기여서 ‘산골’로 불린데다 고려 때는 산동부곡, 조선시대엔 산동방이어서 ‘산동면’이 되었다.

글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구례의 가장 북쪽인 산동면은 북으론 전북 남원과 맞닿았고 서쪽은 전남 곡성군 고달면 등과 닿았는데, 지리산 서북릉 만복대(1438m)에서 출발해 다름재~솔봉~숙성재~밤재(490m)를 찍고, 견두산(774m)~천마산(656m)~깃대봉~누룩실재를 지나는 약 30여km의 견두지맥이 현천마을 위쪽을 지난다. 봄이면 샛노란 산수유가 절정인 이 작은 마을은 견두산 산행의 기점이자 지리산둘레길 ‘산동~주천’ 구간의 길목이기도 하다.

 

꽃길을 걸어요, 둘레길과 견두산

총 20여 구간에 달하는 지리산둘레길 중 남원시 주천면에서 시작하는 ‘주천~운봉’을 흔히 1코스로 부르는데, 이 경우 현천마을이 속한 ‘산동~주천’은 출발점으로 돌아가 둘레길의 끊어진 고리를 잇는 마지막 구간이 된다. 수락폭포 갈림길에서 ‘현천’ ‘계척’ 이정표를 따라 어두컴컴한 굴다리(현천교)를 통과해 10분쯤 올라서면 주차장과 화장실, 쉬어가기 좋은 노거수가 보인다. 이곳이 봄에는 노란색 꽃, 가을엔 빨간색 열매로 어여쁜 산수유마을 현천이다.

둘레길은 마을 앞에서 우측의 현천제(저수지)로 향한다. 산수유가 만개한 3월 중하순이면 물위에 비친 샛노란 반영을 찍기 위해 많은 인파로 북적대는 곳이다. 제방을 걸어 현천을 벗어난 길은 이웃한 연관마을에서 직진해 우리나라 최고령 산수유나무가 있는 계척마을에 닿는다. 이후 환상적인 편백나무 숲을 지나 전남과 전북의 도계인 밤재로 올라서며 남원으로 빠진다.

견두산 등산로도 밤재에서 시작한다. 견두산의 원래 이름은 호두산이었다. 옛날 이 산에 들개들이 떼를 지어 살았고, 이 개들이 한바탕 짖어대면 남원에 호환이나 큰 화재가 생기기 일쑤였다. 이를 막기 위해 호두산을 견두산으로 바꾸고, 남원시장에 호랑이 모양을 만들어 재앙을 막았다고 한다. 현천마을 어르신들 얘기는 조금 다르다. 견두산의 원래 이름이 ‘호랑이 머리’란 뜻의 호두산인 것까진 비슷한데, 견두산에서 보이는 남원에서 매년 한 번씩은 꼭 호환을 당해 결국 산 이름을 개 견(犬)자로 바꿨고, 그 후부터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등산로는 천마산 너머까지 이어지지만 꽃이 피는 3월이면 견두산까지만 갔다가 현천마을로 하산하는 게 좋다. 현천에서 견두산은 3.16km이다.

 

‘자연스럽게’ 활기찬 현천마을

현천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화순 최씨가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뒷산인 견두산이 현(玄)자형으로 되어 있고 뒷내에는 옥녀봉의 옥녀가 매일같이 빨래를 하고 선비가 고기를 낚는 어옹수조(魚翁水釣)가 있어 현천(玄川)이 되었다고 한다. 순 우리말로는 ‘개머내’라고 부른다. 꽃이 피는 3월을 제하곤 대체로 한적해 민박 간판을 내건 집도, 음료를 파는 점방도 없다. “예전에는 겁나게 많았지요. 100여 호는 됐응께.” 현천 사람들이 안 나가면 산동면 장이 허전할 정도였다지만 민가 대부분은 여순사건 때 전소됐다. “그렇게 집들이 모두 타고 겨우 두세 채 남았어요. 요즘의 집들은 이듬해(1949년) 봄에 지었으니 70년쯤 된 셈이지. 1979년에 78호쯤 되었고 그 후에 도시로 나간 사람이 많아요.” 이른 볕 아래의 어르신은 무심히 시선을 돌린다.

둘레꾼과 산꾼을 빼곤 1년 내내 한없이 조용한 마을도 3월 중순 산수유가 만개하면 들썩들썩 분주하다. 그마저도 상위마을과 주 행사장에 비하면 관광객이 덜한 편인데, MBN TV 프로그램 <자연스럽게>가 방송되면서 꽃이 없는 휑한 계절에도 부쩍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작년 8월 처음 방영한 이 프로그램은 탤런트 전인화, 가수 김종민, 농구감독 허재 등이 현천마을에 터를 잡고 생활하는 모습을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김종민 집이 어디지?” 사람들은 마치 숨은 그림이나 보물찾기처럼 이 집 저 집 마을의 낮은 돌담길을 돌며 기웃거렸다.

현천의 대다수 집들은 여전히 견고한 돌담으로 경계를 짓고 있었다. 낮은 담장 위엔 늙은 산수유 가지가 노랗게 늘어져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이면 꽃이 진 자리마다 붉고 통통한 열매가 맺힌다. 옛날 산동면 처녀들은 입에 산수유열매를 넣고 앞니로 씨와 과육을 분리했는데, 어릴 때부터 나이 들어서까지 이 작업을 반복한 탓에 앞니가 많이 닳았고, 이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도 산동처녀는 쉽게 알아볼 정도였다고 한다.

 

뽕나무를 베고 산수유 열매를 수확하다

조용한 동네를 한 바퀴 걸어본다. 사진전망대 앞에 산수유길 5코스 안내판이 서있다. 마을 입구에서 이 전망대를 지나 현천전망대와 견두산 등산로 분기점을 찍고 지리산둘레길 교차점인 현천제를 돌아보는 1.6km의 길이다. 동네를 등지고 쉬엄쉬엄 걷는다. 등산로 초입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꺾는다. 초록의 대숲을 나서면 버려진 제각과 전망대가 나온다. 정작 키 큰 나무에 가려 마을은 보이지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산책 코스다.

전망대엔 ‘열아홉 처녀의 산동애가’ 안내판이 있다. 1948년 열아홉이었던 백부전(백순례)이라는 처녀가(가문의 대를 이어줄) 막내오빠를 대신해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불렀다는 노래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가 산동애가다. 현천마을엔 유난히 산수유가 우거졌고, 감시가 어렵다는 이유로 군인들이 큰 나무를 모두 잘라내 농업 유산이 아깝게 소실됐다는 글도 적혔다.

찬 기운 때문인지 마을은 유난히 더 잠잠하다. 저온창고 공사가 한창인 집으로 들어선다. 젊은 일꾼들의 작업을 마루 안쪽에 앉아 지켜보던 할머니는 “해줄 말은 없지만 커피나 한 잔 마시고 가라”며 따끈한 종이컵을 건넨다. 같은 산동면에서 시집와 50년을 현천에서 산 박정례 할머니다. 어떠셨어요? 처음 시집와서 할아버지를 보셨을 때요. 할머니는 호탕하게 웃으신다. “어째 그냥 시집살이 허고 살았제. 시방같이 요렇게 좋은 세상이 있가니? 좋은 줄도 모르고 일만 하고 그냥 밥 묵고 또 살고 그랬지 뭐.”

할머니가 처음 현천으로 시집온 “각시 시절”에는 뽕잎을 따서 누에를 키웠다. 산수유 수확량이 늘면서 “뽕나무를 싹 캐내뿔고” 산수유나무를 추가로 더 심기도 했다. “동네가 쬐깐해도 돈부자여.” 매실이 제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다 베어버렸지만 한때는 매실, 산수유, 고사리, 밤 등등 건강만 하면 넉넉한 시골살림이 가능했다. 시집 올 때만 해도 초가집에 불을 때고 살았지만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길도 넓혔고 지붕개량도 했다. 오늘처럼 창고 공사를 하는 등 동네는 그 후로도 조금씩 나아졌다.

“늙으니 병원이 가까워야겠더구만.” 할머니는 연신 다리를 주무르고 계셨다. 다행히 작년 하반기부터 백 원 택시가 운행 중이다. 한 달이면 일곱 장의 택시 티켓이 주어진다. 전화 한통에 달려오는 택시 덕분에 읍내를 나가는 일이 그나마 수월하다. 아들만 셋인 할머니는 딸이 없는 게 아쉽다. “딸이 있어야 겠든데. 젊어서 키울 땐 모르것더니 나이가 70 넘고 80이 돼 가니 (목소리를 낮추며) 며느리들이 잘하긴 혀도 듣기 좋은 소리만 해야지, 속에 있는 소리는 몬 하지. 딸들은 다 받아준다두만. 점심은 잡수고 오셨나?” 객지에서 온 이의 뱃속 걱정도 빼놓지 않는다.

TV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외지인들이 찾아오는 게 불편하지 않냐고 여쭤본다. “어째, 동네가 좀 좋아졌는가 어쩐가. 손님들이 많이 온께 좋지. 우리가 귀찮을 게 뭐 있어. 다 좋다고 구경온디.” 어르신들뿐인 동네에 모처럼 활기가 넘쳐 좋긴 한데 단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곡식밭에도 손을 대고, 취나물 밭도 지근지근 밟아불고 그런 죄는 저질러. 그르지만은 할 수가 있어야지. 쫓아낼 수도 없고. 질(길)이 없어서 못 가요, 해도 밭을 밟고 내려와부러. 머구 같은 것도 뜯어가고, 밤도 주워서 조말조말 들고 나오고 헌디 그래도 별 수 있간디.”

할머니 말에 따르면 올해는 “겁나게 큰” 산수유잔치가 벌어진단다. 그때쯤이면 저온창고 공사가 끝나고 아픈 다리에도 따스한 볕이 들어 나아질지 모르겠다. 잔치가 열리면 꼭 다시 오겠다, 할머니 다리에 붙일 파스를 넉넉히 사갖고 오겠다, 약속을 하고 동네를 벗어난다. 비슷비슷한 돌담장 집을 잊지 않으려 대문 앞에 붙은 도로명 주소를 찍어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벌써부터 큰 잔치가 궁금하다. 그 잔치에 어우러져 만개할 노란 꽃도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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