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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의 세계산책_ 노르디스크와 함께한 미국 서부 국립공원 투어 (중)

 

<사람과 산> 미 서부 대륙을 달리다

 자이언 캐년 & 브라이스 캐년

 글 · 신영철 편집주간  사진 · 정종원 기자  협찬 · 노르디스크

 

생존영어의 비애

지난 호에서 밝혔듯 넘치는 짐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요세미티 계곡에선 먹통 전화가  별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데스밸리 야영장에선 가능했다. LA의 후배에게 SOS 전화를 걸었다. “에어컨에서 찬바람 대신 선풍기 소리만 납니다. 그리고 히말라야 원정을 가도 충분할 장비와 식량 때문에, 운전석이 우주선 조종실처럼 좁아졌고요. 무조건 차가 한 대 더 필요해요. 내일 라스베가스 렌터카 회사에서 만납시다. 물론 모든 경비는 우리가 부담합니다.” 그 후배는 미국에서 큰 행사를 자주 했던 베테랑 산악 코디네이터였다. 그의 도움으로 한국 MBC 방송 특집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기획도 초반부터 도움을 받았다.

오케이. 유유상종 산악인끼리라 말이 쉽게 통한 것이다. 그를 만나야 할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예약이 불가능했던 엔텔롭 캐년(Antelope Canyon) 입장권도 그런 부분. 미국대륙에서 자치구로 인정받은 나바호 인디언에게 바가지를 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찌어찌 입장권을 손에 넣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후배 노고가 고마웠다. 돈 독이 올라 15분 간격으로 입장이 진행되는데 행정에 하나라도 차질이 생기면 전체 일정도 엉망이 되어버릴 터. 솔직히 말한다면 나의 생존영어로 앞으로 계속될 첩첩산중을 돌파할 자신이 없다. 선풍기 차 클레임을 비롯 모든 예약에서 원어민 수준의 후배 영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는 대답을 듣자, 우주선 조종실만한 공간에서 홀로 속을 끓여 온 우주병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데스밸리를 떠나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모하비 사막길. 미국 서부에는 3대 계곡(Canyon)이 있다. 지금 가고 있는 자이언 캐년, 브라이스 캐년, 그리고 마지막에 들릴 그랜드 캐년이 그것이다. 그 국립공원들은 모두 라스베가스를 거쳐야 한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 1위로 뽑힌 그랜드 캐년이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광활함이라면, 자이언 캐년은 아득한 바위봉우리가 성벽처럼 둘러싼 야생의 산이다. 그러나 나는 브라이스 캐년 살굿빛 트레일을 다시 만난다는 생각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점심때가 지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밥을 먹어야 하는데 가도 가도 사막이고 식당은커녕 그늘도 없다. 조수아트리만 듬성듬성 서있는 황량한 사막에, 안 보이는 줄 쫙 긋고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주 경계가 나뉜다. 그 경계선 상에 허름한 ‘오페라’라는 여관이 하나 보였다. 이름은 근사한데 여관은 서부영화에서 산초빌라가 나오는 폐허처럼 썰렁하다. 그 끝에 식당이 하나 보인다.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우리는 피자 2판을 시켰다. 한참을 기다려 나온 피자가 호떡만하다. 미국 피자는 거의 솥뚜껑만한데 호떡이라니.

이것으로 10명이 배를 채울 수는 없다. 하지만 추가를 시키지 못한 것은 갈 길이 멀기도 하거니와 여자가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굽는 걸 봤기 때문. 그러하니 크기가 호떡이었고 또 시간도 오래 걸리는 것이다. 대원들 눈치가 썰렁하지만 마음이 급하니 애써 무시했다. 갈 길이 멀고 약속한 후배를 만나 차량부터 해결해야 한다. 막영장에 도착하면 또 근사한 바비큐가 기다릴 터. 그때까지 참자. 우린 고픈 배를 잡고 또 달리기 시작했다.

 

4개 주(州)를 넘나들다

짐차도 승용버스도 아닌 콩나물 밴이 후배와 약속한 라스베가스 렌터카 회사에 무사히 도착했다. 후배 얼굴 뒤로 예수님처럼 후광이 보이는 걸 보니 그동안 겁이 나긴 났던 모양이다. 역시 원어민 수준 영어는 생존영어와 격이 달랐다. 에어컨 선풍기를 또박또박 따지고 사과를 받고 차를 이튿날 바꿔 주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또 쉴 새 없이 달려가야 오늘 목적지 자이언 캐년 들머리 호텔에 도착할 수 있다. 이제 고도를 올리는 과정이라 더위는 없을 터. 밴은 돌아오는 길에 바꾸기로 했다.

후배에게 겁을 먹었는지 한 대 더 빌린 차는 그야말로 막 공장에서 나온 것처럼 새 차다. 당연히 그리워했던 에어컨도 빵빵했고. 한국에서 국제운전면허를 챙겨 온 구멍도사님이 운전을 맡았다. 짐과 일행이 분산되어 널찍해지니까 이번엔 무언가 허전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후배가 새 차 조수석에 앉아 전화 통화를 하니 헤어져도 걱정이 없다. 모든 부분에서 그렇게 서둘렀는데도 역시 자이언 캐년 들머리 허리케인시(市)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한밤중.

따지고 보면 우리는 미서부 4개 주(州)를 달리는 장거리 기행이다. 캘리포니아 중간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요세미티와 데스밸리를 거쳐 네바다주에 들어왔다. 앞으로 유타주를 거쳐서 아리조나주를 돌고 다시 캘리포니아 LA에서 여정이 마무리 될 터. 하나의 주가 한국 서너 배가 되니 주행 거리만 대략 3,000km가 넘는 동선이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건 보고 찍어야 한다. 따라서 운행이 바쁘기도 하거니와 늘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스스로 면죄부를 주었다. 이번 팀은 광활한 미국 서부를 자동차로 달리며 공부를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팀원은 한번 경험한 길이니 언젠가 다시 방문하게 될 것이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심층탐사를 한다면 이번 강행군 경험이 고마울 것이다.

 

자이언 캐년을 관통하며

모처럼 호텔 잠을 자고 난 팀원들 얼굴이 보기 좋다. 차가 한 대 더 늘어나니 우주선 조종실 같았던 운전석이 널찍해졌다. 어제 저녁 봐놓은 월마트로 가서 푸짐하게 시장을 봤다. 자이언 캐년 들머리는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붐빈다. 주말이니 더 그렇다. 문득 공원입구에 걸린 유타주(州)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라스베가스와 1시간 시차가 있다는 게 생각났다. 불끈거리며 솟은 웅장한 산봉우리들에 카메라들이 바빠졌다. 원래 자이언 국립공원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는 엔젤스 랜딩 트레일(Angels Landing Trail)을 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트레일헤드로 가는 도로가 차들로 꽉 막혔다. 산행은 왕복 3시간이면 충분하겠으나 이 상태라면 오늘 오후 행정이 엉망이 될 터. 팀원들과 상의 끝에 포인트마다 정차하여 사진만 얻는 것으로 결정했다. 마지막엔 오줌이 지릴 정도로 가파른 릿지가 이어지나 엔젤스 랜딩의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위험한 만큼 거기서 보는 자이언 국립공원의 풍경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하긴 시간에 쫓겨 그런 비경을 지금까지 어디 한두 번 스쳐 지나쳤을까.

과연 물은 힘이 세다. 웅장하고 장엄한 이 자이언의 협곡 역시 버진강이 만든 것이다. 우리가 지나왔거나 가야할 계곡은 모두 물의 작품이랄 수 있다. 한강에 비한다면 애기 오줌발 같은 버진강이 붉은색의 약한 퇴적암석을 파고들었다. 대략 400만년 정도. 그리하여 양쪽으로 가파른 수직 절벽을 거느린 어마어마한 캐년이 된다. 지층이 들어나는 절벽과 숲과 폭포, 멋진 사암 기둥, 이스트템플 같은 바위 피라미드. 버진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내로우스(The Narrows) 트레일 맛보기를 생략한 것도 아쉽다.

믿기지 않는 스케일의 자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만 눈이 진짜다. 거대한 절벽에 난 동굴이 가까워졌다. 그건 동굴이 아니라 ‘카멜터널’ 창문이다. 유타주 남부의 자이언국립공원과 애리조나 북부를 연결하는 터널이다. 바위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 때 환기와 채광을 위해 5개의 창문을 만들었다. 이 엄청난 공사 덕분에 자이언 캐년과 브라이스 캐년을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엄청난 크기의 화성암 절벽과 우리가 올라온 스위치 도로가 실선으로 보인다. 터널 창문 밖에 펼쳐지는 계곡이 흡사 비행기 기창에서 보는 느낌이다.

 

살굿빛 계곡 브라이스 캐년

브라이스 캐년 들머리 래드 캐년에 도착한 게 오후 1시경. 서두른 효과가 있다. 차가 통과하는 붉은 사암의 자연 터널과 후두(Hoodoo)들이 독특한 풍경구를 만들고 있다. 팀원들이 감탄을 하지만 이건 예고편이다. 나는 브라이스 캐년을 좋아한다. 이곳 역시 수천 년 간 물이 만든 경이로운 풍경이다. 흡사 로마의 원형 경기장처럼 우리는 이 공원을 관중석에서 보게 될 것이다. 백두산보다 더 높은 콜로라도 고원 브라이스 캐년은 숲바다 가운데 있다. 2,700m 고원에서 갑자기 푹 꺼진 거대 원형 경기장처럼 눈 아래 보이는 브라이스 캐년. 이 공원 역시 비와 얼음 그리고 바람이라는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형이상학적 작품이다.

데스밸리 배고픈 피자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이번엔 공원 들머리 뷔페식당에서 배를 불렸다. 이 공원에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공원은 크게 앰피시어터 지역과 레인보우 포인트 지역으로 나뉜다. 여행사를 따르는 탐방객들은 앰피시어터 지역에만 머무르다 간다. 이 지역만 둘러보더라도 국립공원의 많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후두 바로 옆을 걸으며 공원 바닥을 향한 나바호 트레일을 걷는 하이라이트도 있다. 우리는 시간에 쫓겨 내가 꼽은 뷰포인트와 둘레길인 ‘림’만 걸었는데 사진을 찍던 정종원 부장이 사라졌다. 다음 뷰포인트로 이동하기 위해 백방으로 그를 찾으니 1시간 여 후에 슬그머니 나타난다. 사진 욕심에 나바호 트레일을 냅다 뛰어갔다 온 것이다.

나는 연전에 ‘살굿빛 눈물’이라고 이 공원 르포를 본지에 쓴 적이 있다. 그때 12.9km의 페어리랜드 루프(Fairyland Loop) 트레일을 종주했었다. 이름 그대로 요정의 나라답게 난생처음 신기한 산행을 했던 셈이다. 산등성이도 트레일도 온통 살굿빛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사이를 걸었다. 붉은 사암 첨탑에 뚫린 자연 창문들과 요정처럼 사람 형상을 한 무수한 후두 사이를 걷고 있으니 이상할 수밖에. 브라이스 캐년에는 여덟 개의 트레일이 있는데 이들 코스를 연결하면 더 긴 트레일을 만들 수 있다. 릭스 스프링 루프 트레일과 37km의 언더 더 림(Under the Rim) 트레일은 야영허가를 받아야 진입할 수 있는데 다음 목표이기도 했다.

 

확장 중인 풍경구

역시 미국국립공원은 자신의 차나 렌터카로 돌아야 한다. 시간적 제약을 받고 위험 부담을 피하려는 여행사로는 속살을 만날 수 없다. 그렇게 대충 브라이스 캐년을 돈다는 건 아름다운 계곡에 대한 모독이다. “브라이스 캐년은 산행 중 볼 때 가장 멋지다”는 공원측 주장을 믿는다. 우리는 열심히 포인트 위주로 차를 달리고 걸었다. 차가 설 때마다, 풍경은 눈을 들어 바라봐야 한다는 통념을 깨듯이 살굿빛 세상이 모두 발아래 있다. 기기묘묘한 조각상들이 시안의 병마총처럼 발밑으로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수천수만의 자연 조각들도 믿어지지 않지만 그 색깔이 더 놀랍다.

후두라 불리는 살굿빛 봉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제각각 색깔을 달리하며 서있다. 누가 저 후두와 사암 벽에 색칠을 했을까? 그 비밀은 원래 이 땅이 바다였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시간의 바다 밑에서 토사가 쌓여 만들어진 땅이 지각변동으로 솟아 콜로라도 고원이 됐다. 몇 천 년 혹은 몇 만 년이 흘렀다. 소금물은 사라지고 토사의 성분과 박테리아들이 작용해 여러 가지 색깔로 만들어진 진흙이 바위가 됐다. 바위들에 색을 입힌 게 아니고 원석이 그런 색깔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브라이스 캐년은 원래 보석이었다. 아치라 불리는 묘한 암석 자연다리가 경이롭다. 붉은 병풍 암벽에는 창문처럼 구멍도 무수히 보인다.

누군가 브라이스 캐년을, 화려하고 섬세한 여성적 계곡이라고 했다. 갑자기 푹 꺼진 핑크빛 캐년이 어안렌즈로 보듯 둥글고도 부드럽게 전개되고 있으니까. 브라이스 캐년의 지질학이 풍부하고 복잡하다는 말처럼 똑같은 침봉은 하나도 없다. 그 거대한 바위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등산로가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브라이스 캐년은 고도가 높다. 대략 1년에 200일은 낮 동안 얼음과 눈이 녹고 밤에는 다시 얼어붙는다. 물이 얼음이 되면 원래의 부피보다 110%까지 팽창한다. 이로써 바위에 큰 압력이 가해지면서 균열이 생기며 갈라지며 지금의 풍경구를 만든 것이다.

인간에게는 느낌이 없는 시간이지만 침식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브라이스 캐년은 스스로 확장 중이라고 했다. 50년 간격으로 내가 서 있는 고원 쪽으로 약 1피트씩 후퇴하고 있다. 계곡이 점점 더 커진다는 말인데 이런 현상은 지질학적으로 보면 대단히 빠른 속도라 한다. 시간과 풍화가 합작해 동화나라를 만들었다는 지질학자의 설명이 설득력 있다. 천년 후에 이곳에 올 후대 인간들에게 브라이스 캐년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유타를 떠나 아리조나로

과연 우리는 강행군 중이다. 브라이스 캐년을 떠난 차는 아리조나 페이지(Page)시에 위치한 사막 속 민물바다 파웰 호수 야영장으로 가야한다. 엔텔롭 캐년(Antelope Canyon)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붉은 땅 유타를 달리며 미국적 여행이 어떤 것인가 차 안에서 토론이 있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많은 걸 배웠을 것이다. 미서부의 하이라이트를 공부했으니 미래 심층탐방으로 이어질 거라는 말도 있었다. 캐납(Kanab)시를 지났다. 유타주의 캐납은 유명한 분기점이다. 이곳에서 소위 그랜드서클 명소를 찾아 가는 길이 나뉜다.

이곳에서 분기하는 도로는 모두 풍경도로다. 그만큼 풍경이 멋있다. 89A 도로를 갈아타자 이제 아리조나 파웰호수까지는 7마일. 밑 줄 쫙 그은 듯 미국 서부의 직선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결국 예약된 파웰호수 캠프장 도착은 밤중이었다. 그래도 걱정 없다. 워낙 팀원이 전문가이고 또 이젠 미국 야영장에도 손이 익었으니까. 뚝딱 만들어 진 캠프 건설과 모닥불 바비큐는 고단했던 하루 피로를 풀기 충분했다. 하지만 아쉽다. 밤이 모든 것을 덮어 버린 것이. 물을 채우는데 만 17년이 걸렸다는 신기루 같은 사막 속 민물바다. 그리고 거기 떠 있는 호화스러운 배 들. 아리조나 하늘엔 은하수가 손에 잡힐 듯 선연히 흐르고 있다. 우리는 내일 그 호수 속살을 둘러보러 배를 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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