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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벽

 

 

강원도 원주 판대 아이스파크

누구를 위하여 판대는 얼어붙는가!

 

글 · 민은주 기자  사진 · 주민욱 기자

 


얼음이 끓어오를 기세다. 수십 동의 로프가 알록달록 겹쳐지고 아이스툴 한번 휘두를 기회를 찾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이들이 빙벽 앞을 오매불망 서성인다. 1월 첫 주 일요일에만 4백여 명의 클라이머가 찾았다니, 판대 아이스파크의 그 오싹한 밀도에 할 말을 잃는다. 원주클라이머스 회원들이 파이프와 양수펌프를 이용해 2002년부터 인공적으로 얼리기 시작한 판대 빙벽은 이제 명실상부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자 전국 각지 등반가들이 혹한을 기다리는 간곡한 이유가 되었다. 지난 17년 동안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판대에 쌓인 이야기는 얼마나 지난할까.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무엇 때문에 매해 얼어붙는지 묻고자 삼산천을 건너 거대한 판대 빙벽을 마주한다.

 

우리의 얼음은 자유로운가?

어, 어, 우물쭈물하다가 크램폰이 터진다. 판대 100m 빙폭 중단을 오르던 클라이머가 15m는 족히 넘게 추락한다. 강 건너 전망대에서는 구경하던 이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른다. “저 봐, 빙벽등반은 위험하다니까.” 스키복 차림의 커플이 서둘러 승용차에 올라탄다. 판대 아이스파크 관리소 문을 두드리니 마침 서강호(원주클라이머스/원주클라이밍센터)씨가 CCTV로 사고영상을 확인하는 중이다. 리플레이, 리플레이, 꼼꼼한 점검을 위해 화면은 수없이 뒤로 돌아가고 붉은 재킷을 입은 클라이머가 긴 추락을 되풀이한다. “발목을 좀 다쳤대요. 구조대는 필요 없고 자력으로 장비 회수 가능하답니다.” 현장에서 돌아온 판대 아이스파크 관리자 손수남(원주클라이머스)씨가 상황을 전한다.

“사고요? 비일비재하죠.” 지난 17년 동안 판대 아이스파크 관리와 운영을 주도해온 서강호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금까지 30m 이상 떨어져서 바닥을 친 등반가가 일곱 명 있었어요. 사소한 추락이나 낙빙은 셀 수 없이 많았고요. 그래도 아직 사망사고는 없었으니 판대는 정말 운이 좋은 빙장이죠.” 생동하는 얼음을 찍고 오르는 빙벽등반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내재한 행위다. 때문에 대부분의 빙벽등반지에는 혹한처럼 쓰라린 인명사고의 내력이 존재한다. 24시간 돌아가는 CCTV, 겨우내 상주하는 관리자, 판대 아이스파크를 안전하게 운영하기 위한 원주클라이머스 회원들의 노력은 철저하고 삼엄했지만, 그래도 서강호씨는 17년 간 이 빙벽에서 마감한 생명이 없는 것을 행운의 덕분으로 돌린다.

“바로 어제 100m 폭포 좌측에 매달렸던 대형 고드름이 무너졌어요. 다행히 평일이라 아무도 없었지만 만약 주말에 떨어졌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CCTV로 찾아본 당시 영상은 말 그대로 재난영화의 한 장면이다. 20m 상당의 거대한 고드름이 칼로 잘리듯 깔끔하게 갈라져 순식간에 낙하한다. 와장창 부서진 얼음의 파편들이 삼산천 여기저기에 날아가 미사일처럼 박혀있다. 저 어마어마한 낙빙이 주말 오후 복작거리던 클라이머 수백의 머리 위를 덮친다고 상상하니 절로 등골이 섬뜩해진다.

“생각이 많습니다, 요즘.” 가만히 화면을 응시하는 서강호씨의 목소리가 무겁다. “클라이머들은 위험도 등반의 일부라고 말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리자가 빙벽의 모든 위험을 예방할 수도 없고요. 인명사고라도 나면 저희가 법적 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구속되면 사식이나 넣어달라고 농담하지만, 솔직히 겁이 납니다.” 제천 화재사고와 인천 낚싯배 전복사고 등으로 안전문제에 더욱 예민해진 사회 분위기 아래, 태생적으로 규제를 싫어하는 클라이머 수백 명을 상대해야 하는 관리자들의 피로를 짐작할 만하다. 이런저런 인간들의 사정은 아랑곳 않고 올 겨울 판대는 눈이 부시도록 투명하고 청아하게 얼어붙었다. 저 빙벽을 오르는 우리는 과연 지상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판대의 시간, 아이스클라이밍의 오늘

대한민국 빙벽등반이 위태롭다. 2년 연속 포근한 날씨 탓에 촛농처럼 녹아내리던 빙벽이 올해 모처럼 단단하게 제 모습을 갖췄지만, 국내 여러 빙장에서 들려오는 풍문은 그 어느 해보다 흉흉하다. 토지매매 건으로 송사에 휘말린 양주 가래비 빙장은 인근 공장주가 클라이머들의 접근을 방해하고 있고, 화천 딴산빙장은 군청에서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빙벽 인근에 차단줄을 쳤으며, 영동빙장 역시 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 방역을 이유로 80% 형성된 빙벽장을 폐쇄하고 예정됐던 국제 대회도 취소했다. 거기에 심한 가뭄으로 많은 자연폭포들이 얄팍하게 말라붙어 전국 각지의 클라이머들이 판대 아이스파크로 몰리는 깔때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린 건 17년 만에 처음이에요.” 3년째 판대 아이스파크 관리소를 지키고 있는 손수남씨가 혀를 내두른다. “200명 정도면 빙장이 좌우로 꽉 차는데, 지난 주말엔 등반자만 400여 명, 갤러리까지 더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어요. 물론 찾아주신 분들께 고맙고 보람도 있지만, 이번 주부터는 등산학교 교육도 시작되는데 너무 많은 인파가 몰릴까봐 걱정이 됩니다.” 제각각의 이유로 여러 빙장들이 원활하게 운영되지 못하는 요즘, 빙벽등반 교육과 각종 행사 및 대회, 고난이도 아이스클라이밍 대상지로서의 판대 아이스파크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반대로 인파에 따라오기 마련인 낙빙과 사고, 여러 시시비비에 대한 근심도 깊어진다.

“제가 공무원이면 판대 벌써 접었습니다. 저도 클라이머고 빙벽등반에 애착이 있으니까 계속 하는 거지요.” 왜 아니겠는가, 서강호씨와 원주클라이머스 회원들은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들이다. 100m 암벽을 통째로 얼리겠다는 무모함, 200m 넘는 호스에 열선을 깔고 삼산천에서 절벽 꼭대기까지 오가던 수고, 적지 않은 공사비와 전기료를 추렴한 의기는 모두 등반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덕분에 2002년 판대에 처음 기립한 빙폭이 그토록 두텁고 거대할 수 있었다. 판대 아이스파크의 등장은 놀라운 파장을 낳았다. 인공빙장의 가능성에 주목한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이 충북 영동, 단양군, 경북 청송군, 의성군, 강원 화천군 등지에 여러 인공빙장들을 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 아이스클라이밍의 도약기는 바로 이곳, 판대에서 시작됐다.

열정이 언제나 칭송받는 것은 아니다. 매년 빙폭을 얼리는 원주클라이머스의 노하우가 늘어갈수록 판대 아이스파크를 당연한 공간이라 여기는 클라이머들의 익숙함도 커졌다. 운영비를 각출하며 무료로 봉사하던 이들에게 ‘돈 욕심’을 비난하는 루머까지 퍼졌다. 크게 마음을 다치고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친 서강호씨와 원주클라이머스 회원들은 2012년 결국 빙장조성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듬해 다시 판대에 물줄기를 쏘아 올렸다. 이유는 역시 등반에 대한 갈증과 등반가들에 대한 애정이었다.

“겨울만 되면 말로 치사하는 사람들 많아요. 판대 없어지면 자기네는 큰일 난다고. 입장료 받아서 벼락부자 되라는 사람들도 있고.” 이제는 아쉬움도 원망도 없다는 듯 서강호씨가 무연하게 웃는다. “전 그냥 여기가 겨울에 갈 곳 없는 클라이머들 모여서 얼음도 좀 찍고, 서로 안부나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서강호씨의 그 마음이 판대 아이스파크의 시작이자 미래다.

 

그대를 위한 아이스파크, 판대

삼산천 매끄러운 빙판 위에 한 사람이 눈사람처럼 오도카니 서 있다. 붉은 재킷, 살짝 불편해 보이는 발목, 하네스에 여전히 걸려있는 아이스스크루, 조금 전 100m 폭포에서 추락했던 바로 그 클라이머다. 장비를 회수하러 간 일행을 기다린다는 그는 한쪽 발을 살짝 비튼 부동자세다. “발이 터지면서 바일을 놓쳤다”며 겸연쩍게 웃는다. “발목이 꽤 부었어요. 몇 주 쉬어야할 것 같아요.” 지방에서 3시간이나 걸려 판대를 찾았다는 그는 부상만큼이나 100m 폭포 등반을 다 끝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추락이야 뭐, 어차피 등반의 일부죠. 그저 빨리 나아서 이번 시즌 가기 전에 다시 저 빙벽에 붙고 싶을 뿐입니다.” 판대의 청빙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난다. 그래, 클라이밍은 결국 위험과 불확실성을 찾아 나서는 모험이다. 바로 당신을 위해, 판대는 올해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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