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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의 명산순례


赤裳山

적상산·1,034m

글 · 김동규(경희대 산악회 OB)

사진 · 사람과산DB


붉은 치마는 홍조 띤 나의 예쁜 신부다.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맹세의 붉은 피다.

폐비가 되어 민가로 쫓겨난 단경왕후(1487-1557)는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쳐 놓았다. 중종은 경복궁 경회루에 올라 이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또, 강진으로 유배 간 정약용(1762-1836)과 헤어져 살게 된 지 어언 10년, 부인 홍씨는 자신이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를 보냈다. 유배지의 정약용은 이를 보고 애달픈 부부애를 느꼈고, 여기에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부부애의 증표를 마음에 담았다.

붉은 색이 자아내는 광경은 황홀하다 못해 강하다. 적상산의 단풍은 우리를 가을의 향연으로 초대한다. 가을의 마침표로 적상산만한 산도 없다. 적상(赤裳)은 붉은 치마라는 뜻이다.

적상면 들판에서 바라보는 적상산은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은 독립산이다. 8부 능선쯤에 길게 두른 바위 띠도 적상산이라는 이름에 일조를 하고 있다. 치마의 위 하얀 끝단을 연상시키는 바위들은 단풍의 붉은 빛을 반사하고 있다. 산의 윗 단은 거의 수평이고 깊은 골들은 활짝 펼쳐서 흘러내리는 것이, 마치 초례를 치루는 신부가 신랑에게 절을 하기 위해 주저앉으면서 부풀어진 치마이다. 그 위 파란 하늘에는 곤지를 찍은 이마에 두 손을 공손히 올린 신부의 예쁜 상체가 있다.

같은 나무이지만 단풍나무가 유난히 붉은 것은 햇빛이 화창한 봄날 열심히 물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어쩌다 상처 난 부위를 보면 수액이 줄줄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하듯이 다른 색소와 달리 한 줌의 붉은 색소를 얻기 위해서는 유난히 많은 물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적상산은 산꼭대기까지 물이 풍부한 산이다. 바로 이 점이 단풍 산의 명성을 얻게 되었고, 더불어 많은 시설물을 들어서게 하였다. 깎아지른 띠 절벽 그리고 정상부분이 분지라는 점을 간파한 최영 장군의 건의가 발단이 되어 산성이 축조되고, 후에 서고를 만들어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옮겨 보관하였다. 현재는 산 위의 적상호와 산 밑의 무주호의 두 개의 댐을 조성해 양수발전소를 만들어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와인동굴은 적상호의 둑을 만들 흙을 파낸 자리로 덤으로 얻은 시설이다.

서창탐방센터에서 시작한 등산로는 올라갈수록 가파르다. 띠 바위가 떠억 버티고 가로막고 있다.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난감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위벽은 날카롭게 찢어져 다행히 틈을 내어준다. 최영 장군은 탐라를 토벌한 후 귀경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산의 형세가 요새로서 적임지임을 알았다. 그 때 허리에 차고 있던 장도를 뽑아 힘껏 내려쳐서 만들었다는 장도바위이다.

최영 장군 덕분에 가볍게 장도바위를 통과하고 능선에 올라서자 평탄한 길이다. 향로봉(1,024m)에 들러 정상인 기봉으로 향한다. 산의 명성과는 달리 정상으로 가는 이정표도 없다. 정상은 통신사 중계기지 시설 뒤편에 있고 향로봉에 비해 10m 높이에 불과하니 향로봉을 주봉으로 삼으라는 뜻으로 보인다. 지도를 보고 좌표를 찾으니 통신사 철조망 담벼락이다. 당연히 정상석도 없고, 대신 누군가 종이에 ‘적상산’이라고 써서 참나무 기둥에 붙여 놓으니 그 나무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안렴대 바위에 올라 정상은 가장 높은 곳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고려 말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난을 피해 올라 온 삼도 안렴사(三道 按廉使)가 이곳에서 사방을 경계하며 지냈다는 데서 이름을 얻은 바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동쪽에는 가야산, 서쪽은 황해, 남쪽은 지리산, 북쪽은 화악(華岳)을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과연 시원한 풍경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이렇게 사방이 탁 트여서 세상이 다 보이는 곳이 정상이라면 기봉도 아니고 향로봉도 아닌 안렴대야말로 적상산의 정상이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고 덕유산 능선에 눈길이 머문다. 언젠가 아득한 저 길을 다시 걸으면 나의 예쁜 신부와 동행하는 즐거움이 하나 더 늘 것이다.

몇 걸음 걸어 안국사에 도착한다. 과거 최영 장군은 단도를 꺼내 바위를 갈라 길을 냈지만 이제 후손들은 구불구불 찻길을 산 위까지 뚫었다. 사람들은 절 마당에는 승용차를 세우고 산성을 걸으며 적상산 사고(史庫)를 들여다본다.

산 정상에서 찻길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산이 주저앉아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실망감을 안겨준다.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이파리에 빨간 색소를 열심히 날라다 주는 풍부한 물 때문에 이 산 정상까지 도로가 뚫리고 통신사 건물이 산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중에도 별도의 등산로가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과 밑에서 올려다보는 풍경에는 별 상처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서창탐방센터 주차장에서 되돌아본 적상산은 바로 코앞에서 활활 불타고 있다. 부인 홍씨의 은은하고 오래된 정을 나타내는 하피(노을 빛깔의 치마)라기보다는 단경왕후가 가례 때 입었을 활옷이다.

붉은 골짜기에서 불로초가 피어나고, 흘러내리는 물결 속에는 거북이가 헤엄친다. 금빛 잔디 위를 봉황의 새끼들이 아장자장 걸으며 어미를 따라간다. 청, 홍, 황의 넓은 소맷자락에는 노리개가 역시 청실, 홍실, 황실을 늘어뜨리고 있다. 눈을 하늘로 돌리니 머리에는 용잠(龍簪)을 꽂고 뒷 댕기를 드리운 신부의 얼굴이 뽀얗고, 잘 빚은 머리 위에는 금으로 장식한 칠보화관이 눈이 부시다.

화관에 장식한 청강석(靑剛石)을 하르르하르르 떨게 하며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 치마를 부풀리는 신부 앞에서 주인공으로 서는 것보다 좋은 것은 또 있을까. 사계절 좋은 산이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꾹 참았다가 활옷으로 반짝일 때 들여다보자. 차를 타고 훌쩍 꼭대기까지 갈 수 있지만 역시 꾹 참고 밑에서부터 한발 한발 올라 치마의 잔주름까지 느끼며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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